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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Oct 24. 2021

풀 마라톤은 평등하다


11월의 한기가 느껴지는 쌀쌀한 일요일 아침. 싱글렛과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온 몸에 오싹오싹 한기가 들었다. 겨울에는 체온 유지가 중요하다. 뛰다가 더워지면 벗어버리면 되도록 일회용 장갑을 끼고 가벼운 비닐 우비를 입었다. 왼쪽 손목에는 시계를, 오른쪽에는 페이스 분배가 적혀있는 팔찌를 둘렀다. 한 달 전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던 상황이라 내심 걱정하며 팔토시와 목수건을 두르고, 마스크도 준비했다.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건 내 마음과 몸뿐이었다.      


대회장엔 흥분과 설렘, 긴장감이 넘실거렸다. 몇 달 전부터 풀 마라톤 준비를 위해 뛰고 또 뛰었을 주자들 옆에 함께 서니 두근거렸다. 어떤 페이스가 펼쳐질까. 알 수 없다. 뛰어보는 수밖에.      


안내 소리에 맞춰 수많은 인파가 스타트라인에 모여들었다. 풀 마라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인파의 앞쪽 라인에 섰다. 나처럼 처음으로 풀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들의 뒤 그룹에 섰다. ‘섭 4가 눈앞에 있다. 몸아 오늘만큼은 내 말 잘 들어줘.’하고 부탁했다.      


앞사람의 페이스를 따라가다는 엉망이 되기 십상이다. 대회 일주일 전 풀 마라톤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페이스메이커를 부탁했다. 출발 소리가 들리고 일제히 스타트 라인을 벗어나 뛰기 시작했다. 출발 소리에 맞춰 530 페이스를 유지하며 내달렸다. ‘지금까진 괜찮은데? 이대로만 가자.’ 나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8~9km쯤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페이스를 찾을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문제가 찾아왔다. 초반 페이스를 무리하게 잡고 빨리 뛰었는지, 과호흡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팔다리는 너무 멀쩡한데, 아직 남은 길이 구만리인데, 몸은 자꾸만 비명을 질러댔다. 대회를 위해 새로 산 에너지 젤을 출발 전에 먹었는데, 신물이 뒤늦게 올라오면서 기어코 길가에 쏟아냈다. 멋있게 섭 4를 향해 질주하는 그림이었는데, 이 건 몇 달 동안 달리면서 내가 생각한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1km 남짓 거리가 수십km처럼 느껴졌다. 단위를 잘게 쪼개 본다. 눈앞의 500m, 50m 이렇게 쪼개다가, 한 걸음씩만 떼는 데 집중하며 달렸다.      


30km 지점까지 겨우겨우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걷고 싶지는 않고 뛰고는 싶은 마음이 뒤섞여 걷지도 뛰지도 않는 이상한 모양새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러닝 크루에서 같이 달릴 때면 늘 앞 뒤로 이끌어주는 베테랑인데, 길가에서 다리를 주무르며 앉아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늘 잘하는 사람이라도 대회에서 1등만 할 수는 없다. 그만큼 변수가 너무 많다. 대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조금만 더 힘내! 다 왔다!” 35km 즈음, 멀리서 응원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파김치가 된 얼굴과 흐느적거리는 자세로 이미 생각보다 한참 늦게 구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를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외쳐주었다. 러닝 크루 동료는 응원의 메시지가 담긴 패널을 흔들고, 다른 동료는 물이 담긴 종이컵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고통에 절뚝거리며 뛰고 있었는데, 훈련을 같이 해 온 언니는 응원팀의 무리에서 나와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같이 뛰어주었다. 몸에 힘이 조금씩 붙었다. 응원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나를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결승점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피니시 라인 위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1초라도 더 빨리 들어오고 싶은 마음에 온 힘을 다해 결승선을 향해 발을 뻗었다. 드디어 결승점을 통과했다. 8개월의 풀 마라톤 준비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4시간 49분 11초. 그간 하프마라톤, 45km 달리기 기록에 비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기록이었다. 미리 4시간 대 안으로 결승점에 통과한 나를 상상하며, 김칫국을 드링킹 하며 수상소감 같은 소감문을 되뇌어 봤었던 나다. 목표로 따지면 처참한 실패였다.      


목표한 대로 이루지 못하면 금세 실망하고 좌절하는 난데, 이번엔 달랐다. 섭 4를 못했다는 실망감보다는 완주를 해냈다는 기쁨이 차올랐다. 최악의 컨디션에 완주를 해낸 나 자신이 뿌듯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통과해서 맞이한 작은 성취였다.      


기록이 초라해도 괜찮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을, 나만의 풀 마라톤의 기록을 갖게 됐다. 목표에 실패했다고 해도 괜찮다. 누군가는 결과를, 등수를 셈하겠지만 8개월 간의 달리기 훈련에서 내 끈기를 시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인생에서 한 번쯤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해낸 것이 있으니까. 몸이 기억하는 경험이 있기에, 넘어지고 주저앉고 싶어질 때 다시 달려 나갈 힘을 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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