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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Oct 24. 2021

내가 45km를 뛰게 되다니

죽음의 구간을 넘고 넘어 느낀 것들

풀 마라톤 대회에 나갔던 사람들이 말하는 게 있다.  대회 전에 꼭 30km 이상 거리를 뛰어보라는 것이다. 풀 마라톤 완주를 위해 10km, 20km를 열 번 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30km 이상을 한 번 뛰어보는 것이다. 속도보다는 거리감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몸에게 ‘이 정도 장거리를 뛰면 이런 느낌이 나‘하고 미리 예행연습을 시켜주는 것이다.      


감독님은 11월 우리가 출전할 본 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위해 한 달 전 풀 마라톤 대회를 뛰어보거나 대회 출전이 어려운 사람들은 45km를 뛰어보라고 주문하셨다. ‘풀 마라톤 대회 연습을 위해 풀 마라톤을 뛰게 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30km 이상을 뛰어보는 게 어차피 필요하다면 한번 경험해보자 생각했다.    

  

대회를 한 달 앞둔 10월의 첫 주말. 아침 일찍 여의도 공원으로 대회 복장을 갖춰 입고 나왔다. ‘어디 보자... 목표는 45km. 여의도 공원 한 바퀴가 2.5km이니까 총 18바퀴를 돌면 된다.’ 풀 마라톤 대회 준비를 같이 하고 있는 동료 두 명이 함께 달려주겠다고 나왔다. 혼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달리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같이 달리는 이들의 존재가 든든했다. 하지만 결국 달리기는 혼자 두 발로 내디뎌야 하는 일. 시계를 맞추고, 운동화 끈을 다시 동여매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깨끗하고 바람도 잔잔하다. 햇볕이 세지만, 나무 그늘이 있어 달리기 좋다. 호흡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는다. 기록보다는 완주가 목표임을 다시 되새기며 무리하게 달려 나가지 않도록 묵묵히 달리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평소보다 천천히 달리다 보니 10km 정도까지는 대화도 조금씩 할 여유가 있었지만, 15km를 넘어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때부터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가끔 술을 마실 때, 내 상태를 체크하려고 하던 버릇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색을 살피고 ‘나 아직 멀쩡하지?’ 스스로 묻고 ‘그래’ 대답하고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안 괜찮았을 때도 있었지만, 몸상태를 살피고 나에게 질문하는 건, 한 발을 더 옮길지 후퇴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처음으로 20km를 넘어서 달리고 있었다. 하프마라톤 거리를 처음 넘어본 것이다. ‘아직 괜찮아’ ‘달릴만하네?’라고 몸과 이야기하다 보면 속도를 조금씩 높이게 된다. 이대로라면 45km는 거뜬할 것 같다. 하지만 같이 달리고 있는 두 분이 말려주었다. 진짜 시작은 30km부터라는 것, 그때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 둬야 한다고 했다. 대체 30km는 어떤 미지의 세계일까. 모든 사람들이 사점(dead point)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구간, 죽을 만큼 괴로운 구간은 어떤 느낌일까.      


두려움은 현실로 바뀌었다. 30km에 가까이 다가왔을 무렵, 다리의 감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다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다가 기절한 것 같았다. 다리가 피가 다 빠져나가 마비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생각할수록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가 더 힘들어졌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도 온전하고 팔은 여전히 앞뒤로 휘젓고 있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15km 정도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먼 거리 같아, 단위를 바꾸어본다. 공원 여섯 바퀴만 돌면 된다.      


다리는 이미 남의 것 같으니, 할 수 있는 건 팔을 더 열심히 휘젓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의 통증이 극심해진다. 몸도 생경한 경험이라 그런지 사방에서 살려달라 외치는 것만 같다. 몸이 낱낱이 분리되는 느낌이 들다 보니, 어느새 멍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멈추지 않으려면 ‘왜 아프지?’ 라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는 에너지조차 줄여야 한다. 주문을 외워본다. ‘나는 기계다. 자동차다.. 앞으로 향할 뿐이다.’      


그렇게 무념무상의 상태로 39km를 지나칠 무렵, 다리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몸이 적응을 한 것일까. 다리가 조금씩 나아지니 힘이 나서 속도를 조금 높여본다. 에너지가 남아있다. 이런 게 러너스 하이인가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마지막 한 바퀴, 아직 체력이 남아 있는 상태로 결승점에 들어왔다. 4시간 23분. 45km를 다 돌았는데도 더 뛸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아주 잠시였을 뿐 달리고 난 뒤에 몇 주동안 팔 근육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본 대회가 한 달 전이라서 마음이 내내 불안했었는데 45km를 뛰고 나서는 마음 상태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미지의 거리를 달려보면서 내 안에 있는 ‘견디는 힘’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하프마라톤을 뛸 때 주저앉고 싶은 순간들이 수십 번이었다면, 풀 마라톤 거리는 매분, 매초 간 내 안의 의심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화려한 출발선도, 결승점도, 메달도 없던 달리기 연습이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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