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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문꾼 Aug 17. 2021

읽고는 싶고, 읽히지는 않고

 

 시간은 여전히 없었지만,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란 걸 알았으니, 읽고자 할 마음을 다잡았다. 체력의 정의를 익힌 뒤 자신감도 생겼다. 우선순위는 자연스레 정리되었고,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 앞엔 단단한 장벽이 쳐있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한대서 <안나 카레리나>를 펼쳤다. 무슨 놈의 등장인물이 이렇게 많은지, 누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다. 전개가 진행되지 않았다. 한 번은 서울대 필독서라고 해서 <죄와 벌> 을 넘겼다. 주인공의 이름은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라는데, 이름이 무려 열다섯 자나 되었다. 이름이 너무 길어 사건에 몰입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문학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경영, 인문, 사회과학 서적의 생소한 어휘, 무미건조한 문체들이 내용을 어렵게 만든다. 자기계발 서적은 잘 읽히긴 하지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려는 나열들이 싫다. 있어 보이기엔 철학책만 한 게 없지만, 모국어 앞에서 나는 곧 하찮아졌다. 분명 우리 말인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 상황에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비문학은 나랑 맞지 않는다.’     


 독서엔 보상심리가 있다. 이런 식이다. '이걸 읽고 인사이트를 얻어 가겠다.' , '그 시간에 책이나 한 자 더 읽겠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남들이 유튜브나 보고 앉았을 때, 나는 책장을 넘겼다는 것만으로 우월감이 생겼다. 하지만 곧 열등해졌다. 책이 읽히지 않을 거란 것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투자하는 마음으로 빌리느니 샀다. 책이 저평가된 우량주인 줄 알았는데, 읽히지 않는 책은 그냥 저평가된 잡주였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책이 안 읽힐 때마다 좌절했고, 그것들은 쌓여가 배신으로 변질 되었다. 마음가짐을 다지고, 기껏 시간까지 내어 읽으려고 했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차라리 놀았다면 재미라도 건졌지, 읽히지도 않는 책의 글씨만 보고 있는 이것은 얼마나 낭비인가. 나에게 어울리는 말들은 무기력, 좌절, 패배감 따위였다.


  충분히 훈련되지 않는 이상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다. 글씨를 읽고 쓸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간을 읽는 법은 다른 문제니까. 나는 그저 읽어야 하는 마음만 되뇌며, 제목만 읽을 뿐이다.


 본능은 읽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찼는데, 행동은 그러지 않으니 뭔가 불편하다. 이 따로 노는 괴리를 애써 좁히려는 게 인간의 마음이지 않을까. 읽히지 않으니 생각이 행동에 걸맞게 바뀌기 시작한다. ‘적성 불일치.’ 그러니까 책 읽는 뇌는 따로 있다고, 내 한계를 낮춰 버리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내 탓이 아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편해진다.


 적성이 맞지 않아, 책장을 여러 번 덮었다. 잠깐 편했다가 다시 또 반복되는 불편함. 그러니까 유튜브로, SNS로, 웹툰으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내가 쓰는 어휘와 문장들이 학창시절만 못할 때 생기는 가책. 긴 글은 귀찮아서 안 읽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못 읽겠는 퇴보. 점점 머리가 나빠져 가는것만 같은 불안. 비록 내 몸은 스마트폰의 콘텐츠에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그 한 가닥의 읽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지적 갈망이든, 허영이든 이제 읽는 쪽을 택하려고 한다.


 읽히지 않는 불편을 무릅써야 할 것이다. 읽어야 할 길을 택했으니, 읽어야 할 이유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잘하는 공부는 아니었어도, 시험기간이 되면 교과서를 읽고, 개념을 정리하고, 연습 문제 풀고, 오답 노트를 정리했다. 그래야만 시험 당일 날, 답안지 없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하물며 이런 준비도 안된 상황에서 책을 읽으니, 읽힐 리가 있겠는가.


 등장인물 파악이 어려우면 등장인물 관계도를 한 번 그려보고,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 때문에 몰입이 안 되면 김영배로 바꾸어 놓으면 되겠다. 모르는 어휘는 검색하고, 행간을 읽기 위해서 배경지식을 체득해야 하는 이 당연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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