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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문꾼 Aug 10. 2021

읽고는 싶고 시간은 없고

 하루는 여전히 바빴다. 당연히 책 읽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책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책으로 둔다. 왜냐하면, 책의 가치란 그래야만 마땅했기 때문이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읽으세요.'     

'일찍 일어나 읽으세요.’      

‘핸드폰 그만하고 읽으세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한 조언이지만, 당위는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떠 먹여줘도 읽지를 못하니.' 언제부턴가 내 마음 한편에는 알려준 대로 읽지 못한 부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조금 솔직해지려 한다. 과연 독서가 시간의 최우선을 차지할 만큼 매력이 있는가? 그렇다고 그 시간 대신에 책을 읽으면 부채감이 해소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문제에 본질적으로 다가가고 싶어 내 일상을 살펴보았다. 




 ① 가끔 늦게까지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로또에 당첨되면,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 가족에게도 비밀로 해야 할지 따위의 고민은 하필 잘 시간에 밀려온다. 이랬던 ‘잡생각’의 영역을 콘텐츠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침대에 누워 쓸데없는 걱정 따위 할 시간조차 아까운 시대가 왔다. 과거에는 그런 잡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면, 오늘날엔 알고리즘이 그렇다. 내가 봤던 영상과 관련된 영상들이 계속 미끼를 던진다. 그렇게 나는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구독자로서, 충실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유튜브 이외에도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넷플릭스의 넘쳐나는 영화들은 오히려 선택을 방해한다. 요즘 게임은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레벨이 오른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도 될 만큼 편리해졌으나, 게임은 30분에 한 번은 캐릭터를 확인하게끔 우리를 부른다. 비슷하게 SNS의 피드와 카톡 알람들마저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게 한다. 우리에겐 시간의 자투리조차 남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는 생계 앞에서 밑지고 들어갈 때가 종종 있다. 근로계약에 포함되진 않은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들이 있다. 야근과 회식이 그렇다. 야근한다고 시간 외 수당을 주는 시대가 왔지만,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애매한 야근도 있다. 회식도 마찬가지다. 회식을 점심시간으로 대체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아니다. 단체 생활에 불가피하게 참석해야 하는 모든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소속의 대가란 그런 거니까.


  출근길엔 퇴근 후 꼭 책을 읽겠다 마음먹지만, 하필 그날 일이 생겼다. 진상 고객을 만나서 에너지를 다 썼던지, 회식이 잡혔든지, 야근하든지. 아니면 그냥 피곤하든지. 먹고사는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③ 어제는 지영이와 영화를 보기로 했던 날이었다. 근데 현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예매를 취소하고 상갓집에 갔다. 친한 친구라 오늘도 다녀왔다. 벌써 한 주의 이틀이 지났다. 못 보았던 영화를 내일 예매했다. 그런데 그날 하필 부서 전체 회식이 잡혔다.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 또 예매를 취소해야 할 것 같은데, 지영이의 음성을 상상했다.


“오빠, 오빠한텐 내가 얼마나 중요해?”          


머리속이 복잡하다.           


‘요즘 계속 집에 늦게 들어가서, 엄마하고도 밥 한 번 먹어야하는데.’      

    

 심지어 결혼하는 친구가 이번 주말에 청첩장을 준댄다. 이 약속은 이미 2주 전부터 잡았던 약속이다. 


 관계는 날씨 같다. 예측도 못 하고 내 마음대로 통제도 되지 않는 자연현상 앞에서 인간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도 관계예보를 살피며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상처받는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평온하게 돌아가길 바라며, 번거롭고 귀찮아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중에 책보다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순위로 바라본다면, 앞으로도 책 읽을 시간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의 접근은 핸드폰 하면서 놀 시간에 책이나 읽으라는 해결책만 나을 뿐. 그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연속성으로 본다. 그것은 오늘도 했던 걸 내일도 해야 하고, 다음 달에도 하고 있어야 하는 관점이다. 나는 1년 전 구독했던 유튜브를 아직도 보고 있고, 아무리 피곤해도 출근을 하고 퇴근했다. 그리고 기어코 시간을 어떻게서든 만들어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았다. 연속성은 어느 하나의 관점이 아니다. 굳이 나열하자면 의지와 시스템과 체력, 각각 한 스푼 정도는 넣어줘야 다음 달에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책을 읽고자 할 의지야 다들 있겠고, 시스템은 6장 이후에 쓰도록 하겠다. 끝으로 체력에 대해 간략히 말하고자, 어느 트위터리안이 말한 체력의 정의를 빌려왔다. 나는 이보다 더 탁월한 예시를 본 적이 없다.     


 “체력이란 무엇인가? 식재료 구매 후 1시간 동안 다듬고 조리해서 10분만에 먹고, 뜸들이지 않고 바로 일어나 30분동안 설거지 주방 정리한 후 다시 음쓰, 일쓰 버리러 나갔다 돌아와 씻은 후에 널부러지지 않고 바른 자세로 뭔가를 공부하거나 익히는 것." (출처: 트위터, Hyun-woo Park @lqez)

          

 저것이 체력의 정의라면 나에겐 그럴만한 체력이 없다. 배달의 민족으로 주문 후 1시간 동안 기다리고, 포장을 뜯어 10분만에 먹고, 뜸들이지 않고 바로 누워서 30분 동안 핸드폰을 끄적이며, 다시 일어난 후 음쓰를 대충 싱크대에서 헹군 뒤, 널부러져 누운 자세로 끊이 없이 SNS의 피드를 넘기는 나는 저질체력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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