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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문꾼 Aug 03. 2021

책,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환상

 책을 자주 사는 편이다. 한 달에 두 권, 어쩔 땐 일주일에 두 권쯤. 이 정도면 읽는다기보단 사기 위한 책이 되겠다. 이것도 쇼핑이라고 그 패턴이 참 충동적이다. 나는 약속장소로 백화점을 정하곤 하는데, 겸사겸사 책 사기엔 이만 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도 서점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도 와 있다.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때, 합정역 교보문고를 한 번씩 들린다. 남은 환승 시간 내에 가야 하니 신속히 느낌 가는 대로 한 권씩 사온다.

      


 그렇게 산 책들에는 맹점이 있다. 살 때는 분명 너무나 흥미로웠는데, 읽히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다. 큰 맘 먹고 읽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더니, 준비할 게 많다. 어질러진 책상도 치워야 할 것 같고, 당연히 커피도 한 잔 타왔다. 하필 그 때 단톡방의 진동소리도 연달아 울린다. 대화에 끼고 싶지만 친구들 프사나 넘겨보며 참는다. 갑자기 손톱을 다듬고, 여드름을 짠다. 모든 것이 산만하다. 책 읽는 것 빼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다. 결국 책들의 종착지는 책장이었고, 나는 수집가로서 하나의 서재를 완성했다. 그렇게 못 읽힌 책들을 보면 뭔가 불편하다. 물론 처음부터 읽지도 못할 책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표지를 넘길 때의 초심을 되뇌어 보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살다 보니, 읽지 못한거겠지.



 사실 독서 초보는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표지에 끌리고, 제목에 매혹된다. 인기 많은 책을 사는 건 일종의 환상을 사는 일이지 않을까. 마케팅 부서에 소속되어있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이들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TV 광고가 오감을 현혹한다면, 책 광고는 우리의 생각을 노리고 있다. 마케터들은 정교하게 예비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혹은 출퇴근길에 그 책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 아니다. 표지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치밀한 의도였을 것이다. '감'에 의존한 채 제목에 사로잡혀 표지를 넘기게 되고, 목차와 머리말이 나의 '촉'을 곤두세운다. 그렇게 나는 오늘 더 좋은(better) 사람이 될 것 같은 환상을 샀다.     



그 환상을 네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다.     



 하나. 경제적 자유. 책 읽고 공부해서 돈 벌 생각을 하는 사람은 로또를 사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무모한 도박꾼이고, 나는 다르다. 차라리 그 돈을 책에 투자하여 실력을 키운 뒤, 당당하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겠다는 포부랄까. 주식에 관한 책은 워런 버핏의 지혜를 나누어 줄 것이며, 이렇게 모은 시드머니를 땅 사는 데 쓰고 싶다. 부동산 책이 강남땅은 아닐지라도 쏠쏠한 땅을 고르는 데 한몫할 터이니.     



 둘. 퇴사. 역시 퇴사가 답이다. 비록 안정적 일지라도 이렇게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 수는 없다. 꼰대들에게도 자신 있게 내 할 말 하고 싶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며 남의 돈 벌고 있는 아까운 시간을 절약하려면, 역시나 하루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어디 근사한 데 가서 N 달 동안 살겠다. 유튜브나 하면서.     


 셋. 선한 영향력. 자기계발이란 말은 좀 촌스럽고, 더 세련된 표현이 필요했다. 나의 열정과 도전을 통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어떤 잠재력을 발휘할 순 없을까. 이 책을 읽고 뉴턴처럼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꿈꾼다. 그러다 보면 큰물로 가게 될 테고, 어디 풀파티에서 턱시도 입고 샴페인 기울이며, 정계 인사들과 사교를 다지는 상상을 한다. 

     


 넷. 힐링. 아프니까 청춘이었던 시절의 위로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원래 그런거니 힘내렴.'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는 느낌. 하지만 저자의 에토스에 온갖 비판들이 쏟아졌다. ‘너 같은 금수저 기성세대가 청춘을 위로 할 자격이 되느냐.’ ‘아프면 환자다.’ 하지만 인간에게 위로는 언제나 필요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겠는가. 단지 유행만 바뀔 뿐. 그래서 요즘의 위로는 그냥 내버려둔다. 일단 긴 제목으로 관심을 끌고, 돈과 꼰대와 열정에 지쳐있음을 위로하는 밑밥들에 나도 위로받는다. 



 이게 바로 나란놈이다. 쓰고나니 부끄럽게 짝이없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떤 욕구를 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더 나을것만 같았던 미래를 위해 계속 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책장을 채워왔고, 나는 독자가 아닌 수집가였다. 이건 수집가로서 하는 말인데, 책은 돈을 벌어다 주지도 않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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