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더 높게 쳐준다. 나 역시 소크라테스에 대한 환상이 있다.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고,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사랑하며, 눈앞의 쾌락보다는 훗날의 성취가 더 값져 보이는 그런 환상 말이다.
서열을 매기자니,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을 떠올렸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단계별로 설명했는데, 우선순위를 5단계의 피라미드로 나타냈다. 낮은 단계의 욕구를 만족하니, 더 높은 단계의 욕구가 당기고, 그것을 또 채우면, 더 높은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랄까. 욕구 피라미드에 따르면, 자아실현은 식욕 위에 있다. 그러니까 돼지가 식욕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자아실현이다.
매슬로우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많은 공감을 받아왔고, 여러 분야에서 학습자료로 쓰이고 있다. 욕구 이론이 너무나 식상할 쯤, 누군가 또 매슬로우를 언급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삶의 의미'를 주제로 하는 철학수업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신선함을 잊지 못한다. 젊은 철학자는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이 우리나라에서 잘못 번역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상위 욕구가 채워지면, 하위 욕구는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아요.”
발 뻗고 잘 만한 공간이 있는 사람이 한 끼 정도 거르는 건 별일 아닐 거며, 과감히 회사를 떠나는 이들은 회사와 나를 동일시 하지 않는 부류라는 생각들이 스쳐 갔다. 철학자의 해석은 신선했고, 욕구를 차근차근 채운 후 다음 욕구를 향한다는 말보다 더 와 닿았다. 그리고 내 상식도 해체되었다.
어쩌면 내가 오늘 곰탕집에서 3천 원이 아까워 13,000원짜리 특 곰탕을 시키지 않았던 이유도, 13,000원이나 주고 샀던 책을 다 읽지 못해도 돈이 아깝지 않았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매끼 사 먹는 끼니가 흔해서인지 허기를 채우는 그 이상은 사치였으며, 명색에 자기를 계발하기로 했으면서 13,000원밖에 쓰지 않았으니 나는 여전히 배고팠다.
매슬로우 피라미드 꼭대기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나는 그것을 성장, 성취, 창조를 향한 도전이라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좀 달라 보인다. 오늘날엔 자아실현과 성공이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져야 자아실현이다. 당연히 달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남들 다하는 건 성공이 아니니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확률로 이뤄낸 것. 그 정도는 되어야 성공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공을 말하는 책들은 누구나 그것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 순간, 책은 자아실현의 대체재가 된다.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적 법칙,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방법, 1년 만에 1억 벌기와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삶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것만 같다. 절실함은 취업으로, 경청은 매력으로, 제테크는 경제적 자유로 이어지니까. 특히 부자들의 공통적인 사고방식 따위를 읽다 보면 그런 자질은 나도 이미 갖춘 것 같아 안심이다. 아니, 내 손안에 이미 성공이 놓여있다.
이 5번째 욕구는 가장 꼭대기에서 고매한 위상을 뽐내는 것 같지만, 그래 봤자 욕구다. 이는 본능이며, 식욕 성욕과 같은 맥락이다. 욕구는 원초적이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따르기 마련이지 않는가. 그렇게 본능에 기대어 책을 샀다. 욕구와 책과 자아실현의 삼위일체다. 특히 나는 새해가 시작되면 자기계발이라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올해부터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