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문꾼 Oct 06. 2021

싫은 걸 싫어할 수 없을 때

 내가 정한 책만 읽으면 좋겠지만, 같이 읽기로 했으니 그럴 수만은 없다. 독서모임에서는 책 선정을 다 같이 한다. 한 시즌이 시작될 무렵, 구성원들은 책을 추천한다. 추천받은 10권 정도의 책 제목을 칠판에 쭉 나열하고, 각자에게 책을 추천한 이유를 듣는다. 서로가 읽고 싶은 책을 투표하여 5권을 정한다. 그러다 보면 내 취향이 아닌, 혹은 내 수준을 넘어서는 어려운 책도 뽑히기 마련이다.


 선택은 두 갈래다. 읽고 싶을 때만 모임에 나오든지, 하기 싫음을 감수하든지. 전자는 편하긴 해도 연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법. 한 번 안 나오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안나 올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 글은 읽다 보니(b) 하기 싫음을 감수(a)하는 방법을 발견한 얘기다. 본론에 앞서, 싫음을 대하는 내 입장을 한 번 짚고 넘어가려 한다.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 싫어하는 일 열 가지를 하는 것, 그게 바로 어른이다." 


 나에게 들어맞는 아포리즘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게 한다. 스무 살 때, 이등병 시절, 신규직원일 때를 떠올리면, 저 어른이라는 말이 유난히 날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가장 어른이지 않았는데도 어른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싫은 걸 싫다고 투덜대며 어른의 범주에 들지 못했을 때, 징징거리기나 하는 애처럼 보일 것만 같은 게 싫었다.


 어른으로서, 싫어하는 일을 해야만 할 때가 있었다. 좋아하는 스물한 살 누나와 아웃백에 갔는데, 나눠내자니 그녀에게 남자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 나 혼자 5만 7천 원을 결제했다. 선임들 기수와 주특기 암기를 강요하는 상 병장들 앞에선 부당하다고 반박하지 못했고, 술은 잘 못했어도 상사가 건네주는 소주잔은 거절하지 못했다. 인내는 쓰고, 쓴 건 삼키는 거랬다. 싫어하는 걸 견뎌냈을 때, 비로소 보상이 올 줄 알았다. 


 그 이면에는 보상 대신 다른 대가가 있었다. 엄마에게 돈 없다고 용돈을 더 달라는 나의 투정. 군대는 어쩔 수 없다고 똑같이 암기를 시키며, 나 때는 더 심했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던 상병 시절의 위선. 상사가 건네는 소주잔을 거절하는 신규직원의 당돌함에 버릇이나 예의 따위의 단어가 연상되는 걸 보면, 어른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있던 어른스러움은 왜곡되었다.


 믿음에 금이 간 이에게, 저 말은 누군가를 다스리려는 통제 책에 불과했다. 더는 싫음을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만 모아놓은 삶은 행복할까.' 


 좋음이란 상대적이다. 싫어하는 것 반대편엔 좋아하는 게 있었다. 좋은 것들만 골라 쭉 나열해보니, 그중 더 좋아하는 게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머지는 덜 좋아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금세 싫증이 났다. 적응하는 인간에게, 영원한 좋음은 무상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바라본다. 한때 좋아했던 책으로 가득 찼다. 관심 있는 분야,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샀다. 읽는 도중 더 좋을 것 같은 책을 샀다. 한 권 두 권 새로운 것들을 사들였다. 좋아는 하는 데 읽지 않은 책이 한가득 이니, 꼭 좋아하는 게 만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싫어하는 건 어떻게 감수(a)해야 하는가.


 완독률이 떨어지는 책을 토론하는 주에 참석률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피로사회』가 그랬다. 그래도 읽기로 했으니 스타벅스에 가서『피로사회』를 펼쳤다. 나는 뇌가 섹시한 남자라 착각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냐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볼 것만 같은 허영심에 취했다. 하지만 문장으로 들어간 순간, 난 체했다.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였다. 나는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넘기는 중이다. 난 분명 네이티브 스피커인데, 모국어 앞에서 하찮아진다.


 그래서 『피로사회』를 읽은 이들의 리뷰를 보았다. 유튜브가 가장 좋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봤다. 그래도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책을 읽으니 조금 수월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누군가는 이 방법을 보고,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읽기 때문에 선입견도 생기고, 주관적인 생각에 방해 될 수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생각의 방향성을 잡아준다. 주관에 앞서 이해가 우선이지 않을까. 방송인 이경규의 어록을 빌리자면,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댔으니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때도 그랬다. 고전문학의 반열에 오른 책이었고, 무엇보다 서울대 선정 세계문학 전집이다. 하지만 외국이름이 낯설고, 누가 누군지 따지자니 귀찮았으며, 문체는 무미건조했다. 흔히들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리라는데 개츠비의 얼굴도, 그의 웅장한 파티도 그려지지 않았고, 닉이 관찰자라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유튜브로 줄거리 파악을 했더니, 이게 왜 굉장한 고전인지, 어떻게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지, 부잣집으로 시집간 전 여친을 그리워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어, 다시 그녀를 찾아가 꼬시기 위해 파티를 여는 내용이 뭐가 그리 훌륭한지. 무엇보다 삼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사랑은 공감이 가는데, 개츠비의 사랑은 재미가 없어 그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개츠비 역을 맡은 디카프리오의 잘생김만으로 이야기는 알아서 돌아갔다. 그의 열정과 고뇌, 그리고 화려한 파티와 덧없음. 읽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처음 읽는 자에게 교훈 따위는 사치였다.


 책을 읽고 나는 표류한다. 처음에 표류하면, 다음에도 처음이다. 지도의 도움으로 목적지까지 가본다. 내 힘으로 간 건 아니지만, 도착했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 책의 읽는 중 이해가 안 되면 서평을 읽고, 읽기 전부터 엄두가 나지 않으면 영화를 먼저 본다. 누군가의 리뷰가 밑그림을 그려준다. 사실 그 정도로 미리 그려봐야 할 정도의 책이 수월할 리가 없다. 작가의 야심작이며, 한 번 읽고 끝내기엔 나의 내공은 부족했다.


 어차피 인간은 망각의 동물. 나는 잊어버리고, 책은 잊힌다. 그래도 밑그림을 그리고 읽은 책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그 연필 자국처럼. 훗날에 두 번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더 잘 읽을 거라 기대한다. 지금보다 삶을 더 겪는다면 짚이는 게 더 많을테니 말이다. 도움 없이 읽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난 1독이 어려울 땐, 앞선 사람의 읽음을 따라가겠다.

 


이전 11화 불편함에 대한 비망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