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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문꾼 Sep 22. 2021

관계를 읽으러 갑니다.

 보상심리와 좋은 스승에 이어, 세 번째 주제는 글 벗이다. 물론 꾸준히 책을 읽기 위해 함께 읽을 친구를 찾으시라 말하고 싶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들을 생각했다. 인맥이란 누적값이 아닌가. 그래서 아는 사람은 학창시절보다, 학교를 졸업한 시점에 더 많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연락이 뜸해지며 잊혀지는 관계를 생각하면, 누적치는 부풀려졌다. 특히 세상 밖으로 나오니 새로 맺는 인연은 드물었다.


 일터에서 새로움은 스트레스일 때가 많았다. 적응은 아쉬운 쪽이 해야 했으니. 보통 인사이동은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졌는데, 3년 사이 나는 두 차례의 인사발령이 있었다. 이것은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나빼고 서로 다 아는 듯한 분위기는 하루하루 면접 같았다. 나는 살가움을 드러내며 행여나 생길 거부감을 예방했고, 그 사이 상사들의 기질을 기민하게 파악했다.     


 물론 어떤 새로움은 설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전율이 이어지려면 양쪽 모두의 호감이 필요했는데, 그럴 확률은 생각보다 낮았다. 파스타 한 접시를 먹는 짧은 시간 동안 나라는 사람의 상품성을 어필해야 했고, 난 잘 팔리지 않았다. 설렘의 대가는 거절과 상처였고, 상대방과 나는 이것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서른 살에게 관계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았다.

 

 1) 낯설고 불편한 관계에 얻어맞는다.      

 2) 어쩔 수 없이 그리움으로 회귀한다. 불알 친구에게, 동기들에게, 그리고 전여친으로. 친하다는 건 새로움보다 익숙함에 가까우니까.

 3) 그렇게 새로움을 거부한다. 그것들은 귀찮고, 번거롭고, 사치스럽다.  

   

 그 무렵, 우연히 시립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수업에 참여했고, 북클럽이 만들어졌다. 독서모임은 관계에 새로운 감각을 심어줬다. 낯설고 불편해도 만남이 기대되었고, 술 없이도 친밀한 대화가 가능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2주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 사실 책을 읽어가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걸 낯선 사람 앞에서 말로 표현하기란 참 번거로운 일이다. 나의 무식이 드러날 거 같고, 솔직히 그냥 좋았다는 말 이외엔 떠오르는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서모임 회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나보다 15살 정도 많고, 여성의 비율이 높고, 직업도 다르기에 나는 그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모임을 지속하는 비결은 형식(form)에 있다. 사실 형식은 뭔가 고리타분하고, 억압적이며, 재미없어 보인다. 만약 독서모임 홍보 전단이 이런 식이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2주에 한 번 만나는데 책 한 권을 다 읽어와야 해요. 그리고 논제 만들어오는 숙제도 있습니다.'    


 대신 자유롭고 추상적인 문구를 택할 것이다.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오세요.'     


 하지만 자유에는 대가가 있다. 뭐 먹을지 물었을 때 아무거나 먹겠다는 답변에서 오는 공허함, 혹은 넷플릭스에 영화가 그렇게 많아도 볼만한 거 하나 없는 빈곤함 같달까. 그래서 나는 허울 좋은 자유보다, 형식을 택했다. 책 읽자고 모였는데, 아무 말 대잔치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숙제를 해오기로 했다. 2주 동안 웬만하면, 책은 다 읽어오기로. 그리고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질문으로 만들기로 말이다. (이미 여러 북클럽에선 이것을 논제라고 부르고 있었다.) 덕분에 대화는 다른 데로 샐 틈이 없다. 논제에 대한 답변 만으로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절차가 있는 모임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내가 북클럽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서로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세상이 우리를 구분하는 잣대, 그러니까 직업, 소득, 나이도 모른다. 만들어 온 질문에 각자의 생각을 말할 뿐이다. 한 번은 독서여행으로 순천만에 간 적이 있는데, 긴 여정 중 옆자리 선생님의 프로필을 3년 만에 알게 되었다. 그는 서울과 아산을 오가는 주말부부고,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초보 아빠였고, 햄버거 번 만드는 기업에 재직 중이며, 얼마 전 책임자 승진에 밀린 회사원이었다. 물론 독서모임 하는 데 전혀 필요하지 않은 정보였다. 나는 적정한 거리감이 좋다.     


 당연히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관계에서 상처받는 건, 그만큼의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사귄 친구에게 상처받을 확률이 높다. 내 푸념이 공감 받지 못할 때 서운하고, 생각만큼 축의금이 들어오지 않을 때 실망한다. 책을 통해 나름 진지한 얘기를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나는 이런 균형이 좋다.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바쁜 일상 속 2주에 한 권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 읽어왔다면, 칭찬받아 마땅하다. 발언권은 읽음에서 온다. 완독한 이들은 내용을 알고 있으니, 웬만한 논제에 답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인사이트는 말하는 도중, 혹은 듣던 중에 다녀가곤 한다. 노력과 기회가 비례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런 경험은 얼마나 가치 있는가.     


 웬만하면 수평적이다. 사실 일상에서 관계가 수평인 경우는 드물다. 약자가 강자에게, 아쉬운 쪽이 덜 아쉬운 쪽에게, 전자는 후자의 기분을 살피며, 그것이 말투든 태도든 다듬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젊음이 늙어감을 알고 있다면, 능력이 은퇴를 살핀다면, 건강이 병든다는 걸 깨닫는다면, '갑'이 되겠다는 생각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독서 모임은 생계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다.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이 누군가와 소통하려면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해 말하고, 말한만큼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쓰다 보니, 너무 좋은 것만 얘기해서 독서모임이 유토피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막상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참여했다가 실망만 남으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하지만 관계에 유토피아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인간이라면 짊어져야 할 업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난 독서모임에서 찾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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