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아산시 도서관이 개관했다. 지금까지 이런 건물은 없었다. 이것은 도서관인가 문화센터인가. 이 동네 수준이 아니었다. 혁신, 모던, 창조 같은 미래지향적인 단어들을 모두 모아 찬사를 보낸다. 그만큼 도서관은 세련되었다. 이렇게 멋진 장소라면, 공부가 저절로 되지 않을까. 혹은 오늘부터 당장 책을 읽으리라 작심할만한 성지랄까. 아산 중앙 도서관은 그런 장소였다.
도서관 관계자들도 이렇게 멋진 곳을 알려야 했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어졌고, 아산시로부터 행정안내 문자가 왔으며, 도서관 홈페이지엔 각종 강좌가 게시되었다. 강의는 선착순이었고, 공짜였다. 여기에 읽고자 할 마음이 아주 조금 보태지니 조바심이 났다. 나는 급하게 수강신청을 하였고 성공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다.
선생님은 민머리다. 나이가 들며 머리가 빠지자, 그냥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적인 이미지를 위해 도수 없는 안경을 쓴다고 덧붙인다. 아이보리 셔츠에 갈색 넥타이, 베이지색의 면바지 위에 잘 갖춰진 짙은 그레이 계열의 세미 정장이 10년은 젊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가 쓴 헌팅캡은 시인이나 화가를 연상케 했는데,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예술가의 면모였다. 원래 첫인상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옷은 잘 입고 봐야 한다.
선생님은 파란만장했다. 특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개했다. 그는 수산회사, 무역회사, 엔지니어링 회사, 마케팅 회사, 교육회사 등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학생과 시민, 사서와 교사에게 독서토론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강사이며, 4권의 책을 집필한 저자이다. 그가 겪은 세상 물정은 그가 읽은 책을 뒷받침했다. 그래서 그는 꽉 차 있었다. 끝 인상이란 건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내공은 쌓고 봐야 한다.
처음엔 강사가 강연하고 판서하면, 방법론 따위를 받아 적는 수업이려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둥그렇게 놓인 좌석이 심상치 않았다. 불안감에 가져온 전단지를 다시 보았다. 강의명이 <독서토론 리더 양성 과정>이란다. 토론이라... 듣다 보니 번거로운 것들이 많았다.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게 가장 걱정되었다. 역시나 첫 만남 기념으로 선생님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킨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름을 말한다. 나이와 직업이, 독서 수업을 듣게 된 계기가 각자를 뒷받침한다. 서로가 처음 보는 상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유창했다. 물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차례가 왔다. 난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내 무식이 탄로 날 것만 같다. 얼굴이 빨개지고, 떨고 있는 손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음소거 버튼이 있다면 내 목소리에 누르고 싶었다. 여러 사람 앞에 서면 내 목소리는 여려지고, 딱 울기 직전 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저.. 는...ㅇㅇㅇ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My name is ㅇㅇㅇ. I'm fine. thank you.)'
사람들이 나를 아임 파인 땡큐남으로 기억할 것만 같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날의 내가 누군지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첫 수업엔 30명 정도 출석했다. 두 번째 수업에서 1/3이 빠졌고, 그다음 수업에서도 1/3이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까. 남들 앞에서 말하자니 오그라드는 손과 발. 굳이 이렇게까지 시간 내서 스트레스받을 거 있겠느냐는 회의감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난 그만둘 수 없었다.
선생님은 매번 우리를 어르고 달랬다.
"점점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렇게 읽고자 하는 여러분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솔직했다.
"다음 주에도 꼭 나오셔서 이 자리를 지켜주세요. 여러분이 없으면 폐강되는 거 아시죠?"
어떤 날은 강한 동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다음 주에도 꼭 나오세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겁니다."
그리고 묵직했다.
"수업은 나오는 거고, 숙제는 해오는 겁니다. 바쁘다고 견적을 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나에게 그는 도사님이었다. 일단 남은 수업도 다 들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