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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탕에 진득이 오래 앉아있는 건 멋진 일이지만 씻는 게 더 중요했다. 공부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지만, 해야 할 일 들 사이에서 할 일을 또 만든 걸 보면, 빛 좋은 개살구이기도 했다.
온탕은 어떨까. 온탕은 냉탕과 결이 좀 다르다. 따뜻하고 나른하다. 냉탕에 들어갈 때처럼 팔 벌려 뛰기 30회를 하지 않아도 된다. 긴장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일도 없다. 이런 안온함은 누워서 핸드폰을 만질 때의 사정과 비슷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쇼츠와, 틱톡을 번갈아가며 튕긴다.
남들은 퇴근하고 집에 갈 때, 독서실에 가는 내가 기특하기도 하면서도 칸막이 책상에 앉아 정자세로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넘기는 내가 야속하다. '나는 왜 이것들을 통제하지 못하는가.' 자책하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다.
세상엔 재미진 게 참 많다. 어떤 분야든 재미를 느끼려면, 어느 정도 반열에 들어야 한다. 운동이든 음악이든 기본기를 익혀야 하고, 충분히 져본 적이 있는 자만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재테크로 돈 좀 벌어보려면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한다. 재미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30대 직장인, 유부남, 애기 둘 있는 아저씨에게 그럴 시간이 별로 없다. 자연스럽게 단기적인 재미를 좇고 있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오늘도 그럭저럭 유튜브 쇼츠만 넘겼다.
공부를 시작하니 시간이 생겼다. 자연스레 재미의 역치도 낮아졌다. 난 뽀로로가 되었다. 노는 게 제일 좋아졌다. 시험기간은 원래 그런 거 아니겠는가. 마치 졸업앨범이 시험기간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것처럼 그 시간엔 무얼 해도 즐겁다. 여기서 자칫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이 귀한 시간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도배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음먹고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권을 중단했다. 인스타그램 계정도 비공개로 해놓았다. 한 달 만에 다시 되돌려 놓은 걸 보면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다. 온탕의 범주를 스마트폰 전체로 확대해 보았다.
휴대전화의 알림에 난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 단톡방 대화가 100개가 넘게 쌓여있으니 눌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 분유를 주문하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까먹을까 해서 즉시 처리한다.
- 카드대금 납부도래 문자를 보고 이 계좌에서 저 계좌로 돈을 옮긴다.
- 라코스테 셔츠를 70%에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팝업을 눌렀다. 하지만 내 사이즈는 없다.
- 전세와 자가의 기로에 놓인 나에게(어차피 모든 게 대출이지만) <건설경기 악화로 인한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라는 썸네일은 클릭을 안 해 볼 수가 없는 기사다.
급한 일, 급하진 않은데 중요한 일,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데 언젠간 필요할 거 같은 일. 온탕이다. 민법 조문은 분명 한글인데 잘 읽히지 않는다. 문제를 풀어보면 여전히 처음 본 듯하다. 냉탕이다.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는데,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지는 상황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둘은 따로 논다. 직관적인 느낌대로 나열해 봤다.
온탕 : 빠름, 단순함, 직관적, 편함.
냉탕 : 느림, 복잡함, 논리적, 번거로움.
냉탕과 온탕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둘은 양립할 수는 없어도 동시에 존재한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떨어진 해를 돌이켜본다. 그 당시에 난 온탕과 냉탕에 몸을 동시에 담그고 있었다. 이걸 인지하지 못해 공부하는 매 순간이 스트레스였다.
그러니까 나에게 절대선이란 시험공부였다. 모든 걸 다 배제하고 공부를 우선하는 게 이상이었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항상 주눅 들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얼마든지 쉴만했는데도 유튜브를 보면서 이럴 시간이 있겠느냐 벼랑 끝에 날 몰아세웠다. 어차피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공부하는 와중에도 계획대비 부족한 달성률에 불안해했다. 그러면서 사이사이 카톡 답장을 하며 또 한 번 자책했다.
이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도 냉탕과 온탕을 반복한다.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버렸다. 냉탕에 들어갔다. 궁금해서 다시 켰다. 이번엔 추워서 온탕에 들어왔다. 하지만 원칙을 세웠다. 동시엔 담그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