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문꾼 May 12. 2024

ep3. 냉탕과 자기 계발의 상관관계

이전 화

 

떨어지면 떨어지겠거니, 시작은 그랬어야 했다. 도전은 그랬어야 했다.




 난 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하루 한 끼 정도만 샐러드를 먹겠다는 거지, 매 끼니를 닭가슴살과 단백질 셰이크로 채우겠다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에 3회 이상 러닝머신 위에서 뛰려던 거였지, 우락부락 이두와 무자비한 복근을 만들려 했던 게 아니었다. 어디 외국 가서 써먹을 만한 영어표현을 익히려던 거였지, 번역가를 꿈꾼 게 아니었다. 내가 바란 건 고작 이 정도였다.


 새해가 되면 매번 각오를 다지며 식단, 운동, 영어, 독서를 도전했지만, 일주일을 넘겨본 적이 없다. 완벽주의가 이때다 싶어 날 검열한다.


‘거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관성은 무섭다. 딱 한 번 안 했을 뿐인데 다시 시작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결국, 시작부터 나의 계발일지는 흐지부지된다.


 학습된 무기력은 무섭다. 실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다음 해를 기약한다. 에라 모르겠고 목욕이나 하러 갔다.


 냉탕 앞에 섰다. 난 들어가지 못하고 간을 본다. 들어갈까 말까. 이쪽 발을 담그고, 그다음 저쪽 발, 왼손과 오른손을 차례대로 넣으며 움츠리는 꼴이 참 우스웠다. 매번 자기계발로 겪은 실패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난 다양한 성장을 꿈꾸며 깔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운동 중에 책을 읽을 생각을 했고, 독서를 하면서도 다음 시간표를 걱정했다. 여러 분야에 관심은 많았지만, 난 산만했다. 마찬가지로 진득이 냉탕에 들어가 앉아있지도 못했다.


 냉탕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질 때문에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떨어진 거다. 덕분에 그때부터 난 냉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냉탕으로 들어가려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뜨거운 사우나에서 몸을 데우는 정성과 팔 벌려 뛰기 30회를 하는 노력은 당연했다.


 오히려 냉탕에 들어갔다는 결과가 더 중요했다. 자격증 시험은 합격하지 않으면, 과정이 초라해진다. 이젠 발만 담그지 않기로 했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다시 하기로 했고, 이번만큼은 공인중개사 시험공부 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냉탕에 몸을 온전히 담글 수 있었다. 이외로 추위에 금방 적응했다. 다이어트와 독서, 영어공부를 내려놨더니 다음 시간표에 쫓기지 않아도 됐다. 물론 냉탕 속의 추위는 여전히 성가셨다. 그래도 들어간 김에 차가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왕 공부하기로 했으니, 공인중개사 시험공부 스케줄은 다른 일정보다 비교적 우선순위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가움을 받아들일지라도 냉탕 안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난 씻어야 했다. 그게 최종 목표였으니까.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한 뒤, 새 물로 헹구었다.


 언제까지 자기 계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에겐 21일마다 갚아야 할 주택담보 대출금이 있었다. 먹이고 씻기고, 재워야 할 아이들이 있었고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가야 했다. 일터에는 가족보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직장동료가 있었는데, 그들과 몇 없는 승진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삶 앞에서 이해와 오해를 오가며 격려와 갈등을 주고받는 배우자가 있었다. 이 모든 게 공부보다 중요했다.


 냉탕에 진득이 오래 앉아있는 건 멋진 일이지만 씻는 게 더 중요했다. 공부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지만, 해야 할 일 들 사이에서 할 일을 또 만든 걸 보면, 빛 좋은 개살구이기도 했다.


직장인 공부란 그런 거였다.

이전 04화 ep2. 완벽주의와 평타치의 허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