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글쟁이가 사랑을 서술하는법

「호모에로스」서평

by 산문꾼

사랑 앞에서, 우리는 작가다. 작가는 그녀를 떠올리며 풍부한 상상력을 기른다. 같이 있을 땐 그녀를 수시로 살피는 관찰력을 갖춘다. 작가의 서술방식은 어떨까. 당연히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열정을 써 내려갈 것이다. 수시로 확인하는 카톡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를 바래다준 뒤 혼자 돌아오는 1시간의 거리가 외롭지 않으며, 늦은 밤까지 전화해도 피곤하지 않다. 엔돌핀이 솟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졌다.


계절이 바뀌었다. 울리는 카톡에 실시간으로 답하기엔 나도 할 일이 있고, 바래다준 뒤 나 홀로 가는 길은 버겁다. 원래 통화했던 그 시간은 자는 시간이었다. 할 말도 떨어졌다. 그러자 변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 그때가 필살기였고,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어쨌든 변한 건 변한 거니까. 한쪽은 서운함을 느끼고, 한쪽은 미안해하고, 서로가 좀 먹어 가는 중이라면, 내가 빠진 그곳은 늪이었던가.



오래 만나는 연인들은 평온함을 두고, 사랑이 식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안온함을 권태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려면 인제 그만 빠져야 한다. 그게 사랑이든 늪이든. 고미숙의「호모 에로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을 통해 전지적 작가의 시점을 터득해 보는 건 어떨까. 사랑을 책으로 배운다는 이상은 얼마든지 냉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자나 꼬시려는 지침서 따위가 떠오르며, 의심부터 든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익숙한 건 가슴으로 했던 경험, 공감, 코드, 느낌이지 않은가.



하지만 연애의 연대기를 나열해 볼 때, 고통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중이라면,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긴 삶 속에서 전개되어야 할 사랑에 대한 무지를 우려했다. 그러니까 사랑이 시작된 이후 권태와 미움, 갈등과 질투, 돈과 육아라는 삶의 서사가 과감히 생략되는 걸 걱정했다. 에세이스트 오마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가슴이 하는 거지만, 머리가 좀 도와준다고 해서 그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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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낭만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불편하겠지만, 차라리 나는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방향을 택하려고 한다. 그래서 전지적 작가의 시점을 골라왔다.



전지적 작가는 환상과 현실을 구별한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도는 나라별 풍자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경찰이 수사하고, 의사가 진료한다. 일본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교훈을 주고 경찰이 교훈을 준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연애를 하고, 경찰이 연애를 한다.



한국 드라마의 과분한 멜로 열풍을 잘 드러냈다. 환상에 익숙하면, 현실은 서운할 수 있다. 사랑을 보증하는 플롯들이 너무 과분하기 때문이다. 신분적 격차, 주위의 격렬한 반대, 출생의 비밀, 그리고 불치병. 이런 서사를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사랑은 불행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통념은 진짜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지적 작가는 사랑과 욕망을 구별한다. 저자는 시대에 따라 욕망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고 유도하는 사회적 배치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욕망은 만들어지는 것.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집단은 그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교묘하게 사랑을 끼워 넣으며, 마케팅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와 연애의 상관관계는 어떨까.



우리는 맛집, 예쁜 카페, 영화관의 코스를 돌고 돌며 인스타에 업로드 한다. 저자는 자본이 파놓은 홈 파인 공간을 옮겨 다니는 거 말고 딱히 대안이 없다며, 오늘날의 연애를 걱정한다. 돈 쓰지 않으면 둘이 어떻게 놀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덧붙여 고급 세단을 타야만, 예쁜 얼굴과 마네킹 같은 몸매를 가져야만, 나이가 들어도 어려 보여야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돈의 역할이다.



전지적 작가는 억압된 금기를 똑바로 바라본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성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랑과 성욕을 따로 떼어두어 왔다. 결혼할 사람, 연애할 사람이 따로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혹은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농담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걸 보면 사랑과 섹스의 결은 따로 논다. 저자의 비판이 신랄하다.



사랑 없는 성은 위험하고, 성을 배제한 사랑은 공허하다. 이런 전제를 깊이 천착하지 않고 사랑은 사랑대로 성욕은 성욕대로 제 갈 길을 가게 될 때, 쾌락과 금욕이라는 양극단이 형성된다. 쾌락이 기운을 과잉으로 쓰는 것이라면, 금욕은 기운을 과도하게 위축시키는 것이다. 전자가 태과라면, 후자는 불급이다. 둘 다 몸에 해롭다.



연애 초반, 우리는 서로에게 굉장히 특별하다. 그런 초기의 열정이 한결같길 바라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듣기만 해도 지쳐 보인다. 열정은 매일같이 1시간의 거리를 데려다주는 것도 아니고, 수시로 카톡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머리론 알겠어도 마음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사랑의 기술은 이 둘을 맞춰가는 훈련이지 않을까. 이제 그만 주인공에서 벗어나, 신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겠는가?


「호모에로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마르, 연애 초반에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https://youtu.be/vdvwaxrhZ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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