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은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은 날이다. 매번 나는 금연부터 시작해, 다이어트, 영어 따위의 자기 계발을 다짐했다. 특히 독서의 영역은 새해만 되면, 읽어야만 할 당위가 증폭된다. 나는 애독가를 원했지만, 책을 사놓기만 한 채 읽지는 못하고, 불편해하는 수집가(Book collector)에 가까웠다. 세상에는 책 보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그리고 해야만 할 일들이 가득했다.
'저번에 산거 읽어야 하는데.' 책 읽기는 쉽지 않았고, 연초의 기대감은 곧 불편함이 되었다. 돌이켜보자니, 독서에 대한 의무감 뒤에는 아마 ‘배움의 플롯’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것 때문에 독서의 진입장벽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분! 책을 읽으면 당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고, 이런 배움들이 쌓여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답니다.^^’
어떤 성공과 호강을 바랐던 걸까. 나는 아무거나 얻어걸릴만한 성공을 위해 책을 읽었고, 대체로 반 권을 넘기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주제가 뭔지, 사건이 무엇을 은유하는지 따지다가 문맥에 탑승하지 못했다. 차라리 결론을 내어주는 책이 속 시원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 성공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런 부류의 지침은 행동으로 뻗치기 전 휘발되었다. 배움의 의무감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나는 자연스레 독서의 재미에서 멀어졌다.
레이먼드의 카버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의 「대성당」은 나에게 그런 부담을 덜어준 책이다. 주인공(나)의 집에 갑작스럽게 아내의 친구 로버트가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로버트는 맹인이고, 맹인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를 불편해한다. 게다가 아내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들었다. 원하지 않았던 낯선이 와 단둘이 남았다. 결국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티비 채널만 돌리다가 세계의 대성당을 소개하는 채널에 머물게 된다.
맹인은 나에게 대성당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길 부탁한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머뭇거리자 그는 자기와 함께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둘은 손을 포개고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보통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볼 수 없는 사람을 도와주기 나름인데, 주인공은 맹인의 격려와 함께 대성당을 그린다. "자네가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할 수 있잖아." 그렇게 주인공은 맹인과의 소통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편견에 관한 소설이구나. 그리고 나도 이들처럼 소통하는 삶을 살아야지 라고 매듭지며, 책을 덮는다. 에게? 끝인 건가? 어차피 잊혀질 다짐 따위로 끝맺을 거였다면, 그런 결론을 위해 여러 시간 공들여 읽기엔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차라리 요약집을 훑은 채 객관식 문제의 3번 정답을 고를 연습을 하겠지. 그래서 나는 주제, 교훈 따위를 다 제쳐두고 ‘그냥’ 읽었다. 일단은 이야기를 알기 위한 완독은 중요하니까.
배움이 빠졌는데 완독을 보장할 수 있을까. 카버의 첫 번째 장치는 가독성을 높이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력이다. 살아생전에 그는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쓰겠다, 고(위키백과) 대중에게 밝히곤 했다. 실제로 번역되지 않은 원작의 수사를 보면 이런 식이다. 1) he said. "take a look. what do you think?"2) Are you looking? 3)"It's really something." I said. 장황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평론집에서 카버의 간결한 문체를 두고 말한다.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장악한 것을 향해 최단거리로 가라. 특히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리고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느낌의 공동체』2011)
두 번째 장치는 재현(再現)이다. 카버의 문체는 최대한 자기감정을 절제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묘사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쓰레기를 버렸다. 어떤 사람이 구구절절 타이른다. “쓰레기를 버리면 지구가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그 안에 속한 그대 또한 온전하지 못할 거예욥!” 또 다른 이가 내 모습이 찍힌 영상을 나에게 보여준다.
나라면 듣기 좋은(?) 잔소리보다는 두 번째 사람의 영상에 움직일 것 같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아차 싶어 하고, 창피해하고, 되돌아가서 다시 주워오겠지. 누군가의 훈수는 필요 없다. '감각과 사유'는 오로지 나의 몫. 이것이 바로 리얼리즘의 묘미이지 않을까.
“지도가 땅 그 자체가 아니고, 라면 사진은 라면이 아니듯이 책의 요약도 책이 아니라고" 들은 적이 있다. 직접 읽지 않으면 느낄 기회도 없겠지. 1월의 시작을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만 배우고, 느껴보는 것이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