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수업에서 만나는 외국어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겁 없이 석사과정을 시작했던 나는 언어에 대한 끝없는 좌절과 함께 첫 학기를 버렸다. 보통 이런 경우 학생들은 파트타임으로 학기를 늘린다. 예를 들어 매 학기마다 30학점을 채워 4학기에 끝내는 것이 풀타임이면 학기마다 20학점만 하고 6학기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나도 아이가 있었기에 파트타임 과정 신청이 가능했지만 내게는 어떻게든 공부를 빨리 끝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1. 유학을 길게 끌수록 가족들을 생계의 위험으로 내몰 것이라 생각했다. 2. 한국에 계신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아내와 나는 공부를 서둘러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자고 했다.
여기서 만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4학기 만에 석사를 마쳤다고 하면 대단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비단 공부를 일찍 끝내야만 했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우습게 들리겠지만 독일어를 잘 못해서 가능했다. 2학기부터는 콜로키움이란 수업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는데, 선생님들 중 한 명을 정해 그 반에서 3학기 동안 크고 작은 프로젝트와 시험을 진행한 후 논문까지 마친다. 다른 선생님들은 전문 영역이 교육, 공공미술, 큐레이팅 등이어서 학업을 일찍 마치기에는 추가로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았기에 나는 유일하게 개인 작업을 하시는 H선생님을 선택했다. 그분이 다루는 주제나 콜로키움 방식 또한 마음에 들었다.
콜로키움 학생들은 반에서 한 학기에 한 번씩 개인 프로젝트를 발표해야 했다. 나도 첫 발표를 마친 후 다음 친구의 발표 전 쉬는 시간에 잠시 밖에 나왔는데,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괜찮아?” “응? 어. 괜찮은데.” “H가 원래 말을 좀 그렇게 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네가 괜찮다니까 다행이야.” 나는 잠시 상황 파악을 했다. 선생님의 이야기 중 내가 못 알아들은 말이 있었는데 그게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할 만한 것이었나 보다. 다행히 독일어 바보였던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니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남은 학기 내내 그런 식이었다. 한 독일인 친구는 선생님의 크리틱에 울음을 터뜨리고 다음 시간에 반을 바꿨다. 다른 한 친구도 프로젝트 발표 후 반을 바꿨다. 다들 독일어가 잘 이해되니 H의 수업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내가 석사를 일찍 마친 일에 대해 사람들이 칭찬할 때마다 나는 H가 졸업을 시켜준 거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선생님은 내가 불쌍했던지 졸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끝까지 도와주셨다. 물론 학업적으로는 미련이 남는다. 독일어를 좀 더 잘했더라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을걸 하는 아쉬움이다. 사람 일은 참 모른다. 마지막 논문 학기가 시작될 즈음, 내가 학업을 일찍 마쳐야 하는 이유가 둘에서 하나로 줄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난 두 달여 후 둘째가 태어났다. 우리는 긴장을 풀고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집중하여 다시 베를린 생활을 정돈했다. 둘째는 이제 네 살이 되었다. 망각의 동물인 나는 다시는 독일어로 공부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4년 만에 잊은 채 더 공부할 것이 없나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다. 독일어 바보를 불쌍하게 생각해줄 선생님이 아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