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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성 Sep 05. 2021

짝짝이 양말

모국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서 살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모임중 하나는 아이 학교의 학부모님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시간이다. 보통 방과 후 저녁에 모임을 가지기 때문에 Elternabend(Eltern은 부모님, Abend는 저녁을 뜻하는 독일어 명사이다)라 불린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만 해도 큰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열리는 학부모 모임은 아이의 학교 생활 및 수업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는 자리라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 매해 1학기 학부모 모임에서는 교과목 선생님 소개를 하는데 아이가 뒤처지는 과목의 선생님이 소개되는 순서가 되면 더 긴장이 된다. 이제 4학년이 된 큰아이의 학부모 모임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여 본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선생님의 눈빛이 예리하게 느껴졌기에 그 시간 내내 신경을 기울여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의 짝짝이 양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짝짝이 양말이 내 마음을 놓이게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질서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질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기본적인 감정이다. 정돈된 거실, 잘 차려진 또는 식사 후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군무 등에서 우리는 좋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질서의 오랜 반복은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은 성과와 안정이라는 질서를 떠나 휴가와 휴직이라는 일탈로 발을 내딛는다.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하며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다시 설계하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물론 질서 있는 삶은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한다. 하지만 그 질서 안에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긴장을 풀고 나의 의도와 집중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무질서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잠이 아닐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의식, 몸, 시간.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우리의 몸과 정신은 미세하게 어긋나 있던 하루의 오차들을 바로잡는다. 잠이라는 시간이 부족하게 될 때 우리의 낮 시간이 얼마나 무질서해지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1920년 파리의 인구 급증에 대한 대안으로 혁신적인 도시개발 계획안을 제안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파리의 한 지역의 주거 공간을 고층아파트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녹지, 도로, 문화시설로 채우는 것이다. 유럽의 오랜 대도시들의 대표적인 인상이 주거, 문화, 작은 소상공인들이 섞여 사는 모습인 것을 생각했을 때 코르뷔지에의 계획안은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파리에서는 이 계획안이 실현되지 못했지만, 불행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이 모델을 받아들여 도시를 계획했고 한국의 고층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도 크게 보면 코르뷔지에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도시계획은 효율적이다. 많은 인구를 질서 있게 수용하고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최선의 방법인가는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개인적으로 19세기 후반의 추상화가들을 정말 좋아한다. 몬드리안, 클레, 그리고 칸딘스키. 이들은 모두 질서 안에서 무질서한 추상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색, 선, 면과 같은 조형의 근원적 요소들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해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질서가 있다. 우리 집 안에서도 네 명의 질서가 공존한다. 아내에게는 병뚜껑을 잘 닫지 않는 습관이 있다. 나에게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강박이 있다. 큰 아이는 잠들기 전에 아빠나 엄마가 반드시 자기 방에 한 번은 와야 하는 불안이 있다. 작은 아이는 오빠 방, 엄마 아빠 방, 부엌, 거실, 심지어 신발장까지 자기 방처럼 쓰는 자유로움이 있다. 습관, 강박, 불안, 자유로움이 사랑의 질서로 공존하며 네 명의 어른 아이가 사는 집 전체가 하나의 추상화가 된다. 


큰 아이의 수학선생님은 당시 복숭아뼈 위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왼발에, 그리고 목이 없는 양말을 오른발에 신고 있었다. 색만 다른 양말이 아니라 그 종류 자체가 아예 맞지 않는 짝짝이 양말이었다. 내심 '수라는 질서 정연한 학문을 다루는 선생님의 생활습관 속에 비대칭을 허용하는 질서가 있는 사람이라면 '외국인' '남자' '수학 잘 못하는' '초등학생'이라는 다층적인 편견을 가지고 내 아이를 바라볼 만큼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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