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조건을 갖춰야 했다. 하나는 자대에서 이뤄지는 체력검사에 통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님의 동의였다. 얼마 전 창고에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뭔가 하여 집어 들다가 우연히 편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주웠더니 당시 어머니가 나에게 보내신 것이었다. 내용은 하나다. “아들, 파병은 절대 안 된다.” 반면 아버지는 “남자가,” 로 시작하여 “다녀와!”로 전화통화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주변국 연합군 기지에서 적응을 마친 후 작전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만난 것은 임시 컨테이너 막사 몇 개와 나무로 대충 세워둔 초소가 전부였다. 그다음부터는 모두 우리의 일이었다. 부대 주변에 철망을 두르고, 초소 사이에 통신선을 설치하고, 숙소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주변에 모래주머니로 방호벽을 쌓고. 그렇게 해가 떠 있는 동안 삽질을 열심히 했고 해가 지면 초소 근무를 섰다. 처음 두 달은 정말 힘들었다.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는 것도 한몫했다. 두 달쯤 지나자 대부분의 부대원이 들어왔고, 시설이 제법 갖춰져 갈 즈음 한국에 전화할 수 있는 위성전화가 설치되었다. 그걸로 처음 집에 전화했을 때 어머니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세상 쿨하게 아들을 보냈던 아버지는 술만 드시고 오시면 아들 이야기를 하시며 그리 우셨단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리비아에 계셨다. 3년가량 모래뿐인 사막에서 해외 근로자로 일하셨기에 아들의 고됨과 막막함도 누구보다 잘 아셨던 것이다.
지난주 등교 길에 큰 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혼자 학교에 가보겠다고 했다. 집에서 700m를 걸어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거기서부터 5 정류장, 내리면 버스를 갈아타고 3 정류장, 그리고 450m를 걸어가면 아이의 학교다. 어른 걸음으로도 꼬박 35분이 걸리는 등굣길이라 4학년(만 9살)이 되었어도 혼자 보내는 것만큼은 계속 미루어왔다. 그런데 대뜸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내니 한 번 해보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아빠 엄마의 불안한 마음을 부정할 수 없어 아들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매일 아침 아빠와 다니던 길을 성큼성큼 혼자 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새로웠다.
신기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5-10cm나 작아 옷도 나이 하나를 줄여서 입혀야 하는 녀석이 기특하다. 작은 외모 안에 어느새 훌쩍 커 있는 아들이 보였다. 아직은 성적을 잘 받는 것보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녀석도 곧 엄마와 아빠가 십 대에 겪었을 좌절과 실패들을 만날 생각에 걱정도 된다. 그러던 찰나, “아빠. 여기서 뭐해요?” 녀석이 버스 정류장 옆 지하철역 계단에 몰래 숨어 있던 나를 보고 말았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혼자 가봐”라고 했던 쿨한 아빠는 온데간데없고, 거기엔 아들을 보내 놓고 혼자 술을 드시며 울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렇게 아들에게 아빠를 들켰다.
제대를 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아버지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봉사단을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우리 둘은 많은 말 없이 조금 울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와 결혼을 하고 얼마 후 아들을 낳아 아내와 육아를 시작했을 때도 웃으면서 그냥 한 마디 하셨다. "아들, 힘들지?" 아내와 자녀들이 기대했던 사랑은 아니었지만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사랑하려고 하셨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줄만 알았는데, 손자의 등굣길을 미행하던 아들 속에 숨어있었다. "아버지. 여기서 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