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용성 Sep 05. 2021

시리야, 시리얼, 시리아

식탁 위에 올려진 아내의 시리는 아들이 시리얼을 달라고 할 때도 대답하고, 내가 시리아 난민 이야기를 할 때 대답하기도 한다. 즉 시리에게는 공간에 펼쳐지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음성이 주는 문자적 정보가 전부다. 나는 그런 시리가 제법 재미는 있지만 교양은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김규항의 책 [B급 좌파]에서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의 상황이 등장한다. 당시 '구사대'라는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화를 건 사람에게 엉뚱한 대응을 한 방송 진행자의 모습에서 저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동시에 '교양'이 무엇인지 묻는다. "‘구사대’라는 말을 모르는 30대 여자와 40대 남자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 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그것은 결국엔 맨얼굴이 될 유한계급의 사회적인 메이크업일 뿐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 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최근 친하게 지내는 형님 한 분이 기사 링크 하나를 보내주었다. 인공지능 로봇이 그린 그림과 사람이 직접 그린 그림을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될 정도로 기술이 진보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미래에 과연 화가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다소 진부한 질문이 이어졌다. 어떻게 되기는. 그래도 계속 화가는 있을 거다. 왜냐하면 로봇에겐 교양이 없으니까. 그 녀석들에겐 사회적인 분별력이 없다. 설사 컴퓨터가 문자적인 법과 규정이라는 데이터에 의존하여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질 능력을 가진다 해도 기계는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지는 더더욱 모를 거다. 기계는 한 명의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실 안에서 그림 한 점을 그리게 될 때 생겨나는 수많은 의미와 관계들을 알 수 없다. 붓과 물감과 미술재료들을 만드는 공장 직원, 그 공장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들, 화가가 사용하는 작업실의 임대인 혹은 관리인, 그가 매일 작업실까지 가는 교통편을 제공하는 대중교통 기사들, 그림을 그리다 잠시 쉬며 허기를 채우기 위해 간 빵집에서 일하는 파트타임 직원,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의 무게와 의미를 컴퓨터는 모를 거다. 로봇은 기껏해야 자신을 만든 기술자 혹은 자신에게 정보와 명령을 넣어주는 작동자의 의지 정도만을 표현해낸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작업실 안에서 긴 학습과 연습의 시간들을 거친 후 결정한 색과 터치도 없다.


전염병 사태로 인해 학교 수업이 한 동안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독일 내에서도 미술과 음악과 같은 교양수업들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었다. 앞으로 이런 재난들이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텐데 미술수업을 지속해야 하나?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나 인터넷을 보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데 학교에서 굳이 미술수업을 해야 하나? 여기서 아이들의 창의력과 발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다. 그런 것 말고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 학교는 지식뿐만 아니라 교양을 가르치는 곳인데 특정한 상황 때문에 하나의 직업군의 존폐 여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교양이 없는 발상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교육기관으로부터 그와 같이 기계적인 사유의 작동방식을 배우는 것처럼 무책임하고 끔찍한 교육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사장님은 스마트폰을 처음 쓰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얘는 지가 똑똑한 거지 쓰는 사람은 점점 바보가 되는 거 같아." 자녀교육에 관해 최근 읽은 책에서 참 사랑이란 누군가의 능력을 성장시켜주는 사랑이라 하던데. 그럼 결론적으로 시리는 교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도 모르나 보다. 우리 아이들이 시리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시리아 난민 이야기를 하며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얘들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스마트폰의 음성서비스를 꺼둔다. 교양 없고 사랑을 모르는 녀석 하고는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이전 21화 불편함을 용인하는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