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은 루브르에 가기로 했다.

파리의 안나 41

by Anna

아침 임무수행을 하고 시리얼로 배를 채운 뒤 잠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밀린 기록을 작성한 뒤 점심으로는 할아버지께서 외출 후 사 오신 KFC 치킨텐더를 먹었다. 익숙한 치킨 맛이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왜인지 입맛이 없어서 많이는 못 먹었다. 어른들은 무조건 잘 먹는 걸 좋아하는데, 요샌 잘 먹기가 힘이 든다. 오후 2시에는 할아버지와 유로 마트에 갔다. 가는 길에 장보기 목록을 적어둔 쪽지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생각나 민향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았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갑자기 비가 꽤 내렸다.

내가 파리에 사는 이상,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사랑하지는 못해도 받아들이긴 해야 할 것 같다. 88번 버스를 타고 유로 마트가 있는 역까지 가는데 할아버지와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 주처럼 어색한 기운이 감돌지는 않았다. 마트에 도착해 필요한 것들을 고르는데 저번 주보다 더 많았다. 할아버지와 나는 각자 양손에 한 봉지씩 짐을 들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유로 마트 주인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한국인이란다. 어쩐지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더라. 정류장에 도착해서 짐을 놓고 앉았는데 할아버지가 무를 빠뜨리고 안 샀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무를 사러 다시 마트에 가신 동안 나는 장 본 것들을 사진 찍었다.

4시 반쯤 오후 임무수행을 마치고, EMS 정보를 찾아보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매주 수, 금요일 야간개장을 하는데 금요일은 오후 6시부터 만 26세 미만의 학생은 무료입장이다.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은 루브르에 가기로 했다. 가기 전에 미술적 공부를 좀 했어야 하는데, 오늘은 소박하게 ‘모나리자’가 목표였다. 여전히 비가 내리기에 우산을 챙겨 들고나갔는데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95번 버스가 왔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20분 정도 걸려 루브르 앞에 도착했는데 비가 꽤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처럼 무료입장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줄도 생각보단 길었다. 줄을 섰는데 바람도 불고 비도 많이 내려서 너무 추웠다. 그냥 집에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점차 줄어드는 줄에 희망을 가지고 버텼다. 가방 검사를 대충 받고, 피라미드 안으로 입장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중앙 홀에서 한국어 안내 책자를 집어 들고, 오늘의 목표인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드농관으로 향했다. 입장할 때 국제 학생증을 보여주니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들어가라고 하더라.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대표적인 미술작품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사진과 함께 위치가 계속적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나는 모나리자를 찾아가면서 곳곳에 놓인 미술 작품들을 감상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궁전이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천장마저도 멋있고 아름다웠다. 이곳저곳 구경하고, 사진 찍고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모나리자와 반대편으로 와 버렸다. 크게 개의치 않고 왔던 길로 다시 나가니 사람들이 제일 바글바글한 곳 저 멀리에 모나리자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하나씩 뚫고 들어가 맨 앞자리에 서서 모나리자를 봤다. 맨 앞이라고는 해도 사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유리관으로 여러 겹 막아져 있어서 가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디카로 줌을 당겨 촬영을 하고, 눈으로 감상하는데 모나리자가 나를 보고 웃었다. 안경을 쓰고 오길 잘했네. 하마터면 아무것도 보지 못 할 뻔했다. 모나리자 다음은 비너스상이 목표였다. 이리저리 헤매다 발견한 비너스상은 역시나 인증샷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여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함무라비 법전을 찾아 떠났지만 결국엔 보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그냥 지나친 건가?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발도 아프고 눈도 아팠다. 역시 예술 작품을 알고 봐야 제 맛인 것 같다. 아무리 멋있고 예쁜 그림과 조각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언제, 어디서, 왜 그려지고 만들어진 작품인지 알지 못하니 큰 감동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교과서에서나 보던 유명한 그림을 보고, 루브르를 빠져나왔다.

웃긴 게 입장하자마자 해가 들더니 나오자마자 다시 비가 내렸다. 버스는 11분 뒤에 온다. 우산을 쓰고 의자에 앉아 젤리를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옆에 한 가족이 서 있었는데 귀여운 꼬마 아이가 에펠탑 모형을 들고 의자를 내려치기에 쳐다보니 나에게 자랑하듯 흔들어 보였다.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파스퇴흐에 내리니 9시도 되지 않은 시각. 할아버지께 ‘10시 전에는 올게요.’ 했는데 너무 빨리 와 버려서 민망했다. 프랑프리에 들려 맥주를 한 캔 사 오려고 했는데 이미 문을 닫고 정산중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졸고 계시고, 할머니는 인사를 하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셨다. 내가 박물관에 다녀왔다고 말씀드리자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고통이 있어서 이야기 나누기도 쉽지 않고,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심오한 말씀을 하셨다. 밤이 되면 치매 끼가 더욱 심해지시는 것 같다. 늦은 저녁은 아까 먹다 남은 치킨 텐더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감사하게도 나의 밥을 남겨 두셨다. 전과 찌개를 데우고, 고기 몇 점 올려서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풋고추가 참 맛있었다. 저녁 임무수행을 마치고 목욕을 한 뒤 사진을 옮겼다. 정리는 내일 해야지. 열한 시가 되어 간다. 벌써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