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벼룩시장

파리의 안나 64

by Anna

한 달의 끝이자 한 주의 끝이다.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벼룩시장에 갈 계획이었다. 백 팩에 이것저것 짐을 싸서 출발했다. 어제 프랑스 벼룩시장 정보 사이트에서 알아본 ‘Voltaire’ 역 근처의 행사장에 가려고 했는데(2유로의 입장료가 있는 곳이라 그만큼 질이 좋을 거라 예상) 막상 역 밖으로 나오니 어느 방향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도라도 캡처해 올 걸. 오랜만에 길치 은지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역 주변에 행사에 대한 정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곳은 포기하고 몽트뢰유로 갔다. 오늘은 살 물건들도 있었다. 샴푸, 각질제거기, 내 방 청소를 위한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퀵 보드였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잡상인들이 쫙 깔려 있어서 굉장히 사람도 많고 붐볐다. 거의 줄을 서다시피 역 주변을 빠져나갔고 시장에 들어가니 오히려 좀 살 것 같았다. 벌써 세 번째 오는 몽트뢰유 벼룩시장.


우선 샴푸부터 사려고 둘러보는데 처음 발견한 곳은 헤드&숄더가 5유로였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 같은 용량을 4유로에 팔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통기한이 의심되어 샴푸 이곳저곳을 살펴보는데 딱히 정보가 없었다. 어차피 머리 감고 헹궈 낼 샴푸이기에 뭐 오래되어 봤자 얼마나 오래됐나 싶어 하나를 골라 계산을 하려 했다. 주인은 남자와 여자 두 명이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눈빛을 보내자 남자는 ‘Cinq’라고 작게 속삭였다. 지들이 4유로라고 써 붙여 놓고 내가 외국인이니 5유로에 속여서 팔 생각인 것 같았다. 안타깝지만 난 숫자 정도는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어이가 없어 계속 쳐다보니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나에게 “Quatre”라고 말해줬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며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쁜 놈.


다음 목적은 퀵 보드였는데 시장 깊숙한 곳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상태가 멀쩡한 퀵 보드는 없었다. 너무 낡거나 어딘가 망가진 것을 사면 아무리 싼 값에 구입을 해도 후회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이후 1유로 균일가 숍에서 각질제거기와 빗자루&쓰레받기를 샀다. 퀵 보드를 제외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다 샀지만 그냥 가기 아쉬워 구제 의류 쪽에 가서 구경을 하다 H&M 카디건을 2유로에 득템 했다. 저번에 내가 9.99유로를 주고 산 기본 카디건보다 나았다. 헤진 곳 없이 깨끗하여 기분 좋게 구매했다.


만족스러운 쇼핑에 살짝 정신을 팔고 걷고 있는데 어떤 키 작은 아저씨의 어깨에 턱을 정통으로 박았다. 그는 나를 보며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거듭 물어봤고 나는 쿨하게 웃으며 "싸 바"했다. 근데 좀 아팠다. 점심 식사를 위해 마레지구로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내 가방의 두 번째 지퍼가 살짝 열려 있었다. 아마 어떤 놈이 내 가방을 털려고 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곳엔 내 우산과 핸드폰 배터리, 지하철 노선도, 자일리톨 껌 등 잡동사니만 넣어둔 상태였다. 그래도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생 폴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에서 한 커플이 쩝쩝 소리를 내며 키스를 하고 있어서 기분이 더욱 찝찝해졌다. 왜 지하철 입구에서 저 지랄들인지.

배는 별로 안 고팠지만 그래도 활동을 위해 저번에 못 갔던 라스 뒤 팔라펠 가게로 향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기에 그 뒤에 섰더니 주문을 받는 남자가 와서 먹고 갈 거냐고 물어봤다. 그냥 팔라펠 먹을 거라고 하자 테이크아웃 줄로 날 데려가 주었다. 팔라펠 하나를 주문하고 6유로를 지불했다. 긴 줄의 정체는 가게 안에서 먹는 사람들이었다. 테이크아웃하면 가격도 더 싼데 왜 굳이 저 복잡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오늘도 “Sans tomate”를 써먹었고 이번엔 다행히 ‘씰부쁠레’가 입에서 나왔다. 사실 저번에 케밥을 주문할 때 나도 모르게 ‘플리즈’가 나올 뻔해서 당황했었다. 불어와 영어의 혼합이라니. 한 가지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참 웃기다.

아무튼 토마토가 들어있지 않은 거대한 팔라펠을 받아 들고 포크를 챙겨 공원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가에서 인증샷을 찍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조금 창피했다. 저 멀리서 나를 보던 외국인이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본인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황당했지만 그냥 웃어주고 말았다. 어찌어찌 걷다 보니 공원이 나왔고 비어있는 벤치가 없어서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던 남자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팔라펠은 생각보다 그저 그런 맛이었다. 유명하니까 한 번 먹을 만한 정도? 앞으로 다신 안 사 먹을 것 같다. 양도 꽤 많아서 다 먹지 못하고 버렸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비둘기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들어 찝찝한 마음에 자리를 떴다. 또 어찌어찌 가다 보니 프리피스타 2호점이 나왔고 조금 구경하다 시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프리피스타보단 킬로샵에 중점을 두고 구경했다. 킬로샵에서 괜찮은 가죽 재킷을 하나 골랐는데 무게를 재어 보니 가격도 18.65유로였고 기장이나 팔 길이도 나에게 딱 맞았다. 하지만 이 옷을 정말 내가 자주 입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구매는 하지 않았다. 가죽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고 안에 택도 하나도 없는 것이 수상해 사지 않았는데 사이즈가 딱 맞았던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사지 않은 것이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조금 일찍부터 돌아다녀서 그런지,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더 피곤했던 건지 기운이 없어서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카드를 찍는데 안 찍히자 기사 아저씨가 뭐라 뭐라 말하는데 그냥 나중에 찍어라 뭐 그런 말인 것 같아서 들어가 앉았다. 결국 내릴 때까지 다시 카드를 찍지는 않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LCL에서 300유로를 뽑았다. 환율이 5년 사이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해서 저번의 인출과 금액이 얼마나 차이 날까 궁금해서였다. ATM기 버튼을 누르자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좀 당황스러웠다. 무사히 인출에 성공하여 집으로 가서 은행 계좌를 확인해보니 저번에 300유로를 출금했을 땐 원화로 약 417,000원이 나갔는데 이번엔 409,000원이 나갔다. 약 8천 원 차이다. 수수료의 차이도 있겠지만 어쨌든 환율이 내려간 덕에 훨씬 이득을 본 셈이다. 앞으로 유로 환율이 어떤 식으로 변동될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프랑스에 있는 1년 동안은 하락세였으면 좋겠다. 언제 환율이 오를지 모르니 주기적으로 돈을 인출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아마 여기서 더 떨어지지는 않겠지?


집에 와서 목욕재계 후 방 청소를 했다. 오늘 산 각질제거기로 발 각질도 깎아냈는데 하자마자 돌이 떨어져 나갔다. 이럴 줄 알았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생각보다 쓸 만했다. 내 방에 이렇게 많은 먼지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니. 주기적으로 청소를 좀 해야겠다. 내일은 아마 엄마 아빠가 한국에서 보내준 내 옷들이 배송될 것 같다. 프랑스의 우체국 ‘크로노 포스트’의 악명을 익히 들어 집까지 무사히 배달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마 9월 첫째 날부터 내 기분을 망치지는 않겠지. 이렇게 하숙집에서의 한 달이 지나가는구나. 시간이 정말, 정말 빠르다. 풍성한 가을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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