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5
대망의 이사 날! 어김없이 하늘에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날씨 예보도 하루 종일 ‘비’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일찍 일어나 씻고, 마지막으로 이모의 맛있는 밥을 먹고, 짐을 싸서 9시 10분쯤 나갔다. 원래 계획은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하나 끌고 가 언니를 만나 계약한 후,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와 남은 캐리어 하나를 더 끌고 갈 생각이었지만 비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와서 우선 백팩만 매고 가기로 했다. 결국 나는 민박집과 자취집을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셈.
‘Auber’ 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Opéra’까지 걸어갔는데 벌써 힘이 들었다. 무조건 앉아야 된다는 생각에 빈 의자 쪽으로 갔는데 이게 웬일? 집 중개인 언니가 앉아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집에 가는 길. 언니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홀로 파리에 온 나를 대단하다고 했고, 파리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벌써 살 집을 구했다는 사실에 운이 좋다고 했다. 집에 도착해 언니에게 집 사용 시 주의할 사항 몇 가지를 들었다. 나도 궁금했던 쓰레기 버리는 법과 방음에 대한 질문을 했고, 답변을 받은 뒤 계약금과 보증금을 지불했다. 원래 보증금은 수표로 200유로를 드리는 거였는데, 민박집 사장님이 도와주기로 해놓고 수표를 다 썼다고 하셔서 결국 현금으로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언니가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보증금을 100유로만 받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깨끗이 사용하겠다고 약속드리고, 그렇게 보증금 100유로와 방값 나머지 261유로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 후 언니는 교회에 가셨고, 나는 좀 쉬다가 캐리어를 가지러 가려고 밖에 나갔는데 여전히 비가 내렸다.
바보같이 우산도 안 챙겨가서 다시 집으로 들어왔는데, 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기에 일단 먹고 보자는 심정으로 물을 끓였다. 한국에서 챙겨 온 컵라면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오랜만에 먹는 신라면 컵은 정말 맛있었다. 밥을 말아먹고 싶었지만 즉석 밥은 캐리어 안에 있었다. 집 바로 앞에 프랑프리가 있다. 일요일은 오후 1시에 문을 닫는다기에 당장 먹을 식량을 사기 위해 장바구니를 챙겨 나갔다. 규모는 민박집 앞에 있는 곳보다 좀 작았다. 가장 중요한 물과 휴지를 고르고, 먹고 싶었던 액티비아 파인애플 맛과 내일 아침 먹을 시리얼, 우유를 사고 후식으로 먹을 납작 복숭아 4개, 저녁에 먹을 치킨 샐러드를 샀다. 내가 동양인이라 무시하는 건지, 계산원은 인사도 안 해주었고 왠지 불친절한 느낌이었다. 매일 와서 내 얼굴을 익혀주겠어! 집에 와서 사 온 것들을 정리하고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왼쪽 주머니엔 집 열쇠를, 오른쪽 주머니엔 나비고를, 비옷 주머니엔 핸드폰을 넣고,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낭테르로 갔다. 가는 내내 비가 왔다, 그쳤다를 반복했지만 다행히 캐리어를 끌고 나왔을 때는 약한 비가 흩날리는 정도였다. 지하철에 타서 처음과 같이 오페라 역으로 가는데 하필이면 그 긴 환승통로에 나 혼자 있었고, 어디선가 시끄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딱 봐도 집시처럼 생긴 여자 4명이 계단 양 끝에 두 명씩 앉아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이야기를 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계속 큰 소리로 뭐라 뭐라 씨부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 계단을 지나야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계단 앞으로 가 낑낑대며 짐을 드니 아까부터 중얼거리던 그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들이대며 정말 소름 돋게 친절을 가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것도 말로만 듣던 집단 소매치기 수법이구나 싶어 무시하고 캐리어를 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반대편에 있던 다른 한 명도 일어나더니 갑자기 내 옷을 잡는 게 아닌가. 아마 내 비옷 주머니를 노린 것 같다. 다행히 핸드폰이 들어있던 그 주머니는 지퍼로 잠근 상태였고, 나는 순간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진심 짜증 난 목소리로 “아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 손으로는 캐리어를 꽉 붙들고 오른쪽 팔로는 주머니를 사수하자 그들은 그저 ‘아님 말고’, ‘싫음 됐어’ 이런 태연한 표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순간 욕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더 심한 쌍욕을 퍼부어 줄 걸 후회가 된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나도 모르게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솔직히 아까 그런 상황에서 걔네가 작정하고 내게 덤볐으면 나는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돈은 하나도 들고 있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집과 가까운 ‘Les Gobelins’ 역에 도착했는데 마치 날 위로해주는 듯 해가 떴다. 그런데 오히려 난 그 해가 날 놀리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짐이 무거워서 힘든데 해까지 뜨니까 비옷이 바람을 차단해서 더워 죽는 줄 알았다. 역에서 집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순간적으로 ‘살기 싫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고생을 한 번 더 해야 하다니.
아무튼 집에 도착해서 거의 뻗다시피 했고, 아까 만난 집시 소매치기단에 대한 하소연을 위해 남자 친구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그래도 무사해서 천만다행이다. 오랜만에 미래랑도 연락을 했고, 메일로 집 구하기 스토리를 들려준 뒤 5시쯤 다시 민박집으로 향했다. 집시들을 피하기 위해 이번엔 샤틀레 역으로 환승했는데, 현재 공사 중이라 에스컬레이터도 없었고, 계단도 너무 많고, 환승 구간도 훨씬 길어서 그냥 포기했다. 민박집에 다다를 때 즈음 또 비가 마구 쏟아졌고, 매니저 언니와 이모에게 집시 단한테 털릴 뻔 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잠시 쉬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떴다. 파리 날씨는 참 사람을 들었다, 놨다 밀고 당기기의 고수다.
다시 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모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매니저 언니에겐 언젠가 연락하겠다며 그렇게 세 남자 하우스를 떠났다. 지쳐서인지, 이번 캐리어는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고 오페라 역에서 환승할 때는 또 그년들을 만날까 봐 한참 쫄았지만 다행히 없었다. 무사히 환승하고, 무사히 도착한 건 좋은데 마지막 난관인 수많은 계단들. 힘이 빠져서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낑낑 대며 계단을 올라가니 친절한 아저씨가 선뜻 들어주셨다. 처음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끝내 본인이 들어서 올려주셨다. 진짜 감동. “Merci, beaucoup’하고 밖으로 나가니 또 계단이 나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낑낑대며 올라가니 내려오던 아저씨가 또 선뜻 짐을 들어주셨다. 다만 이 분도 드는 게 좀 버거워 보였는데 그래서 더 감사했다. 정말 진심을 다한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 파리 사람들은 역시 친절하구나. 타지에서 넘어온 거지들이 나빠서 그렇지 여긴 꽤 살만해, 라며 자기 위안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계단 15개 정도를 올라가야 하는데 여기가 진짜 최대의 고비였다. 왼 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들고, 양손으로도 들고. 최대한 소음 없이 옮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쿵쿵대며 그렇게 아주 시끄러운 이사를 마쳤다.
집에 들어와서는 쏟아지는 땀과 끊어질 듯 아픈 팔을 붙들고 한참을 의자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드디어 나 혼자만의 집에 온전히 들어오게 되었구나! 기쁨도 잠시 짐을 풀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꺼내 채워 놓으니 정말 여기 사는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비록 19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알차게 살고, 깨끗이 쓰고 나가야지!
저녁은 그리웠던 쌀밥과 김자반! 그리고 마트에서 산 치킨 샐러드를 먹었다. 김자반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다소 소박하지만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달콤한 납작 복숭아를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역시 행복은 이런 사소함에서 시작되는 거다. 프랑스식 화장실과 욕실에 적응하며 씻고, 누웠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도 나고 조금 불안하지만 푹신푹신 편하구나. 내일은 늦잠을 잘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