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6
눈을 뜨니 아침 8시였다. 늦잠 자려고 했는데, 아직 몸이 민박집의 아침밥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찌뿌둥한 몸으로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배가 고파 1층으로 내려왔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침대에서 나오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아직 2층 침대가 적응이 안 된다.
아침밥은 어제 프랑프리에서 산 시리얼! 시리얼은 nature라는 단어가 있기에 건강을 위해 골랐고, 우유는 귀여운 소가 그려진 가장 싼 녀석을 사 왔다. 평범한 맛이었다. 평범한 것을 골랐으니 당연한 건가? 우유는 우리나라에서 먹던 우유보다 조금 더 진한 맛이었는데, 나는 서울우유가 더 맛있는 것 같다. 시리얼은 그냥 바삭하고 고소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혁명 기념일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개선문으로 향해야 하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관람할 힘이 없었다. 이사 후유증으로 양 쪽 팔도 쑤셔서 사실 어디 돌아다닐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나 하자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후 6시쯤엔 창문으로 햇빛이 너무 강하게 들어와서 소파에 앉아서 했다.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여기서 먹으니까 라면도 맛있네? 그렇게 약간은 허무한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저녁 9시쯤인가. 갑자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프랑스혁명 기념일인데? 1년에 딱 한번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데? 이런 날에 내가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는데? 그냥 방에 처박혀서 노트북만 두드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밤 11시에는 에펠탑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에펠탑과, 불꽃놀이의 조화라니. 그저 몸 상태가 별로라는 핑계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사실 계속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말까의 이유는 무서워서였다. 어제 만난 집시들 때문에 위축된 것도 있었고, 아직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밤 분위기가 어떤지 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 안 가서 할 후회가 더 클 거라고 생각해서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었다. 9시 20분쯤 집을 나섰고, 지하철 1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샤틀레 역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한 남자가 나를 불렀다. “Excusez moi, madame”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덩치 큰 아저씨가 나에게 불어로 솰라솰라 말을 했다. 대략 샹젤리제 쪽으로 가고 싶은데 어느 호선을 타야 하냐는 물음 같았는데 순간 당황하여 “Je ne sais pas, pardon” 하고 내 갈 길을 갔다. 아니, 수많은 외국인들 놔두고 왜 나한테 질문을 했지? 신종 사기인가? 만약 정말 몰라서 물어본 순수한 아저씨라면 미안하지만, 잔뜩 위축되어 있던 나는 온갖 추측을 하며 환승을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술 취한 젊은이들도 보였고, 가족단위도 많았다. ‘Franklin D Roosevelt’ 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할 때는 아예 줄을 서서 걸었다. 점점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도 빨리 에펠탑과 불꽃놀이를 보고 싶어! 원래 바토무슈를 탔던 ‘Alma marceau’ 역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이미 통제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léna’ 역에 내렸다. 밖에는 경찰들이 쫙 깔린 상태였다. 술을 가지고 있거나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무사히 통과. 그때 시간이 대략 10시 40분 정도였던 것 같다.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역 앞은 난장판이었다. 길을 보니 내가 ‘팔레 드 도쿄’를 공짜로 보기 위해 헛걸음했던 곳이었다. 나는 무작정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갔다. 건물 사이로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신나서 사진을 찍어 댔다. 저녁을 좀 일찍 먹어서 그런지 출출하기에 챙겨 온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1시 정각! 에펠탑에 반짝반짝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숨죽여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펑!!!”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서 있었던 곳에선 보이지 않았다. 큰 건물이 막고 있어서 에펠탑 뒤쪽으로 연신 터지는 불꽃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망했구나, 싶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불꽃도 못 보고 그냥 돌아가는 건가? 안 좋은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펠탑에서 불꽃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와악!!” 소리 지르니 옆에 있던 아저씨가 웃으며 쳐다봐서 민망했다. 디카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입으로는 연신 예쁘다, 예쁘다, 감탄을 했다. 드디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15분쯤 쇼를 보고, 너무 늦으면 안 될 것 같기에 지하철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아까 내렸던 이에나 역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멘붕이 왔다. 집에 어떻게 가지? 밝은 낮에도, 손에 지도가 들려있어도, 길을 못 찾는 나인데 이 어둠에 이 많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지하철역을 찾느냐는 말이다. 순간 울고 싶었다. 나온 것이 다시 후회되기 시작했다. 우선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었다. 그랬더니 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큰 불꽃들이 보였다. 정말 예뻤지만,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다시 뒤를 돌아 경찰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 앞에 있던 가족들도 경찰에게 지하철역을 묻는 듯했고, 시크한 경찰 아저씨는 저 쪽이라며 손 짓 했다. 그때부턴 무조건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아니 거의 뛰다시피 했다. 길거리엔 소리 지르고 폭죽을 터뜨리는 미친놈들이 많았고, 난 빨리 이 어두운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뒤 쪽으로는 계속 화려한 불꽃이 터졌지만, 눈길을 줄 새도 없었다.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개선문 앞! 밤에 보는 개선문도 아름다웠다. 얼른 디카를 꺼내 사진을 찍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탄 것까진 좋았는데 사람이 하도 많아서 샤틀레에서 내리지 못했다. 1호선은 하필 안전을 위해 스크린도어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닫히는 문 사이로 뛰어들지 못하고 결국 다음 역에 내려서 반대 방향을 또 타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레 고블랑. 아무래도 조용한 동네다 보니 길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집까지 뛰어갔는데, 우리 집이 아니었다. 다시 멘붕이 왔다. 뭐지? 어디부터 잘못 온 거지? 고블랑에서 내린 것 맞나? 판단력까지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니 내가 갔던 길은 집에서 반대편이었다. 거의 경보 수준의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당도했다. 급하게 열쇠를 꺼내 집으로 들어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집에 왔다는 안도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아야지. 적어도 이 동네에서는.
그래도 에펠탑과 불꽃놀이는 정말 멋졌다. 내일은 정말 늦잠을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