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7
눈을 뜨니 10시 반이었다. 긴장도 풀리고 피곤도 쌓여 있어서 그런지 푹 잤다. 뒤늦게 아침을 먹고 오늘은 진짜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마트 정보를 찾아보았다. 저번에 라데팡스에서 구경했던 큰 마트에 가고 싶었는데 3존이라 먼 데다, 요금을 더 내야 해서 포기하고 다른 지점이 있나 검색해 보았다.
찾아보니 ‘Auchan’이라는 대형마트였는데 파리 시내 쪽엔 없고 근교에 가야 있다고 한다. 지식인에서 알려 준 곳은 동쪽 끝이라 너무 멀고, 그냥 아무 역에나 내려서 찾아볼까 싶었지만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라 계속 인터넷만 붙잡고 있었다. 이러다 오늘도 마트 문 닫기 전에 못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씻고 준비한 뒤 다시 노트북을 켰다.
열심히 검색에 매진한 결과! 7호선 ‘Le kremlin bicêtre’ 역에 오샹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집에서 4 정거장만 가면 된다. 야호! 신나서 가방을 챙기고 그새 가득 찬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0층으로 갔다. 쓰레기 하나 버리려면 열쇠로 문을 두 번이나 열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무사히 쓰레기를 투척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했다.
아직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라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경계 대상이었지만 그래도 날씨가 선선하니 덥지도 춥지도 않아 기분이 좋았다. 역에서 내려 바로 보이는 큰 건물에 내가 바라고 찾던 오샹이 있었다. 그래, 내가 바라던 대형마트야! 1층은 문구류나 옷, 생필품들이 팔기에 0층으로 내려갔다. 작은 카트를 하나 뽑아 들고, 마트의 끝에서 끝까지 지그재그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원래 적어간 필수 목록만 사려고 했는데, 살구 쨈이 먹고 싶어 하나 집어 들었고, 내 입을 즐겁게 해 줄 초콜릿도 하나 샀다. 그리고 유명한 ‘Bonne maman’ 마들렌도 집어 들었다. 커피도 사려고 했는데 너무 많은 종류와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옆에 있던 차 코너에서 레몬차를 골랐다. 그 이후엔 필요했던 쌀과 식기세척용 세제, 키친타월을 카트에 담았고, 다시 1층에 올라가서 린스와 바디 워시, 바디로션, 섬유유연제를 골랐다. 난 가난한 워홀러이기 때문에 최대한 가격이 저렴한 것들로 사려고 노력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얼추 다 고른 셈.
또다시 0층으로 내려가 당장 오늘 저녁 해먹을 스파게티를 위해 면과 파스타 소스를 담았고, 식용유도 작은놈으로 하나 골랐다. 집에 있는 액티비아를 뿌려 먹을 샐러드 채소도 샀고, 무려 0.45유로의 바게트와 발라먹을 초코 박힌 버터를 마지막으로 쇼핑을 끝냈다. 사고 싶은 건 훨씬 더 많았지만 장바구니 하나만 가져온 상황이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울 것 같았고, 정말 무거웠다..
오늘의 장보기 총금액은 31.12유로. 생필품을 사느라 꽤 썼는데 나름 알뜰하게 잘 산 것 같다. 팔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이틀 만에 또 느끼고 말았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오샹, 자주 가야지! 집에 돌아와서 장 본 것들을 사진 찍고, 정리한 후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생긴 건 좀 맛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샐러드 채소가 씻어져 나온 것인지, 씻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대충 물에 헹구고 먹었는데 좀 썼다. 원래 그런 맛인 건지 내가 제대로 안 씻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배를 채우고, 새로 산 린스와 바디 워시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는데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여기 물에 맞춰 나오는 제품들이라 그런지 머리도 몸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슬슬 파리에 적응해 가는구나. 혼자 사는 날도 16일밖에 안 남았다. 하루하루 정말 소중하게, 알차게 생각하고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