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9
밤새 잠을 설쳤다. 예기치 못한 더위 때문이다. 침대에 누울 때만 해도 잠들면 괜찮아지겠지 싶었지만 금방 온몸이 땀에 젖어 일어나야 했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선풍기를 틀어 2층으로 올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파에서 잤다. 그런데 창문을 닫은 채 선풍기만 틀고 자는 것이 걱정되어 2시간 내지 3시간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게다가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잤더니 등 쪽이 쑤셔왔다. 잠도 설치고, 온몸은 여전히 땀범벅이었다.
원래 계획이었던 바스티유 시장은 오후 1시에 닫는다. 이런 몸 상태로 나가봤자 짜증만 날 것 같아서 창문을 열고 침대에 올라서 다시 잠을 청했다. 방충망이 없는 구조라 벌레나 새가 들어올까 봐 꽁꽁 닫아 둔 창문이었는데 아무래도 더위 때문에 오늘 밤엔 열고 자야 할 듯싶다. 알고 보니 꼭대기 층이 여름엔 제일 덥고, 겨울엔 제일 춥다고 한다. 집 중개인 언니한테 살기 좋다고 말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말이 후회가 된다.
한숨 자고 일어나 점심으로는 치킨 파스타를 해 먹고, 마레지구 빈티지 숍 구경을 가볼까 했으나 집에 들렀다가 다슬이를 만나러 다시 시청으로 가야 했으므로 그냥 내 사랑 에펠탑에 가기로 했다. 어제 구제 숍에서 산 3유로짜리 천은 건조대에서 아주 뽀송뽀송 잘 마른 상태였다. 요긴하게 쓰고 있는 내 꽃무늬 장바구니에 천을 고이 접어 넣고, 집에서 가져온 기욤 뮈소의 책과 시원한 물, 간식으로 먹을 복숭아 두 개를 챙겨 에펠탑으로 향했다.
파리에 온 뒤 두 번째로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얼마 전부터 폐쇄되어 있던 트로카데로 광장도 활짝 열려 있었다. 나도 광장 안으로 들어가 나무 밑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한가롭고 좋았다.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독서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오랜만에 펼치는 기욤 뮈소의 책. 프랑스에서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참 책을 읽다 에펠탑 사진도 찍고, 복숭아도 먹고 쉬다가 슬슬 일어났다.
광장 가운데 분수에서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너나 할 거 없이 물놀이 중이었다. 이끼가 껴서 초록색으로 보이는 물에서 참 잘들 놀더라. 여자들은 비키니 차림이었고 남자들은 트렁크 차림이었다. 그들을 보며 잠시 시원함을 느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9호선은 정말 지옥이었다. 사람도 많고, 덥고, 냄새나고. 프랑스는 분명한 선진국이고 국민들 세금도 왕창 걷는다던데 왜 지하철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집에 와서 딸기 타르트를 먹으며 쉬다가 다슬이의 연락을 받고 6시 20분쯤 다시 집을 나섰다.
시청역 앞의 회전목마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시청 앞에서 콘서트를 열어서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 했다. 게다가 아무리 찾아도 회전목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슬이를 찾을 수 있을까? 내 짧은 불어 실력으로 경찰관에게 회전목마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머릿속엔 ‘슈발(cheval: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 맥도날드가 보이기에 와이파이라도 써서 연락을 해봐야겠다, 싶어 다가가던 중 누군가 “은지야!”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다슬이었다.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서로를 찾았던 스토리를 들려주고 저녁을 먹으러 생 미셸 먹자골목까지 걸어갔다.
여러 식당 중 한국말로 우리를 맞이하는 곳에 들어갔고, 난 개구리 뒷다리 요리와 와인에 절인 닭요리, 초코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다슬이가 불어를 조금 하자 식당 직원들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약간 성적인 농담도 했는데 개방적인 그들의 사고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다슬이는 그간 하숙집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나에 대한 걱정과 조언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그 일들이 다슬이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고마운 다슬이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맛있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던 저렴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시청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마트에서 맥주라도 한 캔 살 걸 그랬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먼저 집에 돌아왔다. 집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열기. 초콜릿은 다 녹아있었다. 이런 방에서 자야 하다니. 오늘은 창문을 꼭 열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