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21
파리에 온 지 3주째 아침이다. 일기예보 상 ‘뇌우’의 날씨였는데 여전히 더웠다. 한국에서는 그냥 입지 못했던 크롭 티를 과감히 착용하고 우선 집 앞 프랑프리에 갔다. 다 떨어져 가는 물과 우유, 그리고 맥주 두 캔을 샀다. 한국에서도 종종 민증 검사를 당하는 터라 당연히 내 나이를 의심할 줄 알고 여권까지 챙겨 나갔는데 아무 문제없이 구매에 성공했다.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작은 마트였는데도 맥주의 종류가 많았다. 이제부터 내 목표는 이곳의 맥주 종류별로 다 마셔보기! 우선 맨 아랫줄의 맥주 2캔을 골라왔다. 50cl의 용량 치고 싼 가격이었다. 한국에서 수입맥주를 마시려면 두 배는 내야 하니 여기 있을 때 많이 즐겨야지.
간단한 장을 본 뒤 센 강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파리 플라쥬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강한 날은 아니었지만 분명 일광욕을 즐기는 파리지앵들이 넘쳐날 것. 퐁네프 역에 내렸는데 아쉽게도 플라쥬가 끝나는 지점(혹은 시작하는 지점일 수도)이어서 긴 구경은 못했다. 사실 더워서 남 선탠 구경할 처지가 아니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센 강을 따라 쭉 걸어갔다. 다리마다 예쁜 곳도 있고, 으스스한 곳도 있고, 재미난 곳도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이 반가웠지만 걸어갈 힘이 없어 ‘Invalides’ 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공원의 그늘은 시원하겠지’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트로카데로에 내렸다. 여전히 더러운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지만 별로 안 시원했다. 파리가 더워지긴 했구나. 며칠 전만 해도 그늘은 시원했는데. 어쨌든 챙겨 온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빵으로 공복을 매우고, 복숭아로 당분을 섭취한 뒤 책을 읽었다. 기욤 뮈소의 「당신 없는 나는?」 집에 있는 그의 책들 중에 고심하고 골라 온 한 권이었다. 제목이 뭔가 훗날의 나, 즉 지금의 나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내용은 기욤 뮈소의 다른 책들과 비슷했다. 그를 좋아하지만, 그의 비슷한 주인공들과 스토리 전개는 이제 감흥이 없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반전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은 아직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10장 정도 읽고 나서 영 진도를 나가지 못했던 책이었는데, 파리에서 그것도 에펠탑 앞에서 읽으니 술술 넘어가더라. 결국 이틀 만에 그리 큰 시간을 투자한 것도 아닌데 다 읽어버렸다. 소설에 나오는 파리의 곳곳이 이제 익숙하게 느껴진 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웃겼다.
독서를 마치고 잠시 돗자리 위에 가방을 베고 누웠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하지만 여유를 느끼기엔 너무 더웠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강아지 한 마리가 내 돗자리 옆에서 몸을 베베 꼬며 장난을 치기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고 간 곳은 마레지구. 어제 못 찾았던 프리피스타의 1호점(사실 정확히 몇 호점인지는 모른다.)이 지도상 생 폴 역과 굉장히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다시 한번 찾아가 보려는 생각이었다. 왔던 길 되돌아가기 등의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은 찾아내고 말았다. 정말 가깝고 눈에 잘 띄는 곳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지나치기 쉬운 곳에 있었다. 오후 시간대여서 그런지 쓸 만한 옷은 없었고 그 대신 귀여운 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마음에 드는 모자도 찾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사지는 않았다. 2호점도 들렸는데 역시나 득템은 실패. 괜찮은 옷을 사려면 일찍 와야 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너무 지쳐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니 시위대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소리치며 걷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는 상황.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쩐지 도착했을 때부터 무장 경찰들이 도로에 쫙 깔린 것이 혹시 탈옥 범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날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영문도 모르는 시위대를 피해 급히 역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며 눈앞에서 유리병이 깨졌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난리가 나고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거리에 멈춰 섰다. 다시 한번 “쨍그랑” 하며 시위대 중 누군가가 던진 유리병이 바닥에 파편을 튀며 깨졌다. 무서웠다. 이러다 총이라도 맞는 거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얼른 역으로 대피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시위대와 방향이 같았다. 돌아서 시청역으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중 갑자기 함성소리와 함께 그들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상가 쪽 벽에 붙어서 꼼짝달싹 못하고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는데 다가오는 검은 무리들. 무장경찰 수십 명이었다. 아무래도 경찰들 때문에 방향을 바꾼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시위대가 지나간 후 급히 역으로 발길을 재촉했지만 경찰들이 지나간 후 몰래 뒷모습을 찍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영문도 모르는 사건에 휘말리기 전 마레지구를 벗어나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언어가 안 되므로 포기. 아직까지도 궁금하다. 그들은 누구이고, 왜 그런 일을 벌였으며, 어제가 혹시 무슨 날이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반 이스라엘 시위를 하던 유대인들이었다.)
아무튼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씻고 맥주 한 캔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