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23
간밤에 창문을 열고 잤더니 비가 내려 금방 낮아진 기온 탓에 감기 기운이 들었다. 7시 알람을 듣고 깨었지만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띵 했다. 조금 더 자고 일어나 아침으로 어제 먹다 남은 닭볶음탕을 해치우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데 계속 머리가 아팠다. 챙겨 온 종합 감기약을 먹고 오후 1시쯤 다시 침대에 누웠다. 2시간 반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굳이 에펠탑까지 가지 않기로 했다. 매일 에펠탑 보기라는 목표는 내가 파리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위해서였는데 최근 들어 에펠탑을 보지 않아도 여긴 낯선 땅 프랑스 파리구나,라고 스스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오늘은 몸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니 사진으로나마 대체하려고 한다.
내 첫 번째 목표였던 ‘매일 에펠탑 보기’는 ‘보고 싶을 때마다 보기’로 약간 수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파리에 사는 이상 걷다 보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금방이라도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에펠탑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버스를 타고 가보려고 한다.
이틀 치 장을 보러 오샹에 가는 길.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며칠 전만 해도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잤었는데 하루아침에 감기에 들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지다니. 파리의 겨울이 벌써부터 두렵다. 그래도 내 사랑 구제 숍의 도움을 받으면 추운 겨울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장을 보기 전 구제 숍에 들렸는데 그곳에서 Ceilo의 남자 남방을 1.50유로에 겟! 박시 핏의 남자 남방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분 좋은 득템이었다.
오샹이 있는 대형 쇼핑몰 이름은 ‘Okabé’다. 언제나 다양한 상품의 종류와 저렴한 가격으로 나를 기쁘게 하는 마트! 식재료를 사기 전 2층에 올라가 플라스틱 컵을 찾아봤지만 죄다 유리컵뿐이었다. 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부족한 언어 실력에 그냥 포기하고 미용 코너에서 아세톤을 하나 집어왔다. 이제 패디큐어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어!
1층에선 샐러드 채소와 새싹 채소, 드레싱으로 쓸 액티비아 딸기 맛, 저녁 메뉴인 데워먹는 피자, 후식으로 먹을 타르트를 샀다. 계산을 하려고 제일 짧은 줄에 줄을 섰는데 내 앞의 남자가 자신이 고른 물건들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나보고 잠시 자리를 맡아 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점점 다가오는 계산 순서. 나는 그렇게 한 손엔 그의 카트를 다른 한 손엔 나의 장바구니를 잡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결국 뒷 분들에게 먼저 순서를 양보하니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양보받으신 분들의 계산까지 다 끝나갈 무렵 그는 헐레벌떡 돌아왔는데 나도 모르게 얼른 오라며 손짓까지 했다. 그는 고맙다며 나보고 먼저 계산을 하라고 했고, 계산하는 도중 얼떨결에 나에게 양보를 받은 분들께서 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셨다. 이래저래 고마움을 받은 즐거운 장보기였다.
저녁으로 맥주 한 캔과 피자, 샐러드를 먹었다. 이제 매니큐어와 패디큐어를 하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