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번 버스

파리의 안나 24

by Anna

날이 많이 흐리다. 이상하게 기분도 덩달아 흐리다. 아침으로 퍽퍽한 시리얼을 먹고, 점심으로는 생각보다 달콤한 식빵을 먹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brioche’가 버터와 달걀을 많이 넣어 맛이 단 빵이라고 한다. 그렇게 배도 채우고 씻고 나갈 준비는 다 되었는데 꿀꿀한 날씨 탓인지 외출하기가 싫었다.

미적거리고 있을 때 대학교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얼굴 못 본 지 1년도 넘었고, 연락한 지도 꽤 되었는데 갑자기 카톡이 와서 놀랐다. 여행 중이냐고 묻더니 대뜸 언제 돌아 오냔다. 이유를 물으니 그가 일했던 EBS에서 4개월 정도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내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에게 나는, 믿고 일을 맡겨도 될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구나 싶어 뿌듯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라 내년에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아쉽다고 말했다. 나도 아쉬웠다. EBS라면 대표 교육방송 채널이고, ‘다큐프라임’ 제작이라면 평소 관심은 지대하지만 무지했던 ‘다큐멘터리’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귀국을 할 수는 없었다. 연락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한국에 가면 보자는 안부 인사로 끝을 맺었다.


그것 때문에 내 흐렸던 기분이 더욱 흐려졌다. 갑자기 두려움이 앞섰다. 내년에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무엇을 하지? 4학년 1학기와 2학기는 어떻게 보내야 하지? 취업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과 잡념들이 나를 괴롭혔다. 당장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해결되는 문제들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한 편으론 ‘나는 잘 될 거야.’하는 근거 없는 긍정심도 생겨버렸다.


머리가 아팠지만 이대로 집에만 처 박혀 있기엔 내 시간과! 내 나비고가! 아까웠다. 그래서 집을 나섰다. 오늘은 꼭 버스를 타보자, 라는 다짐과 함께. 원래 집 앞에서 바스티유를 가는 버스를 찾아 타려고 했는데 불량스러워 보이는 아저씨 둘이 버스 정류장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기에 자연스레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Place d’italy’ 역부터 시작되는 5호선은 지금까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하철 노선이다. 의자도 깨끗해 보이고, 지상으로 운행되기 때문이다. 1호선은 자동으로 운행되는 시스템이던데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다.

마레지구에 도착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프리피스타로 향했다. 내 얼굴을 익혀 주겠어. 오늘은 꽤 쓸 만한 옷들이 많았다. 옆에서 같이 옷을 고르던 아줌마가 숄을 걸쳐 보이더니 나보고 괜찮냐고 묻기에 “싸 바” 했다. 나도 2유로에 내 몸에 딱 맞는 겨울용 점퍼와 비치 원피스를 득템 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2호점에 갔지만 거긴 사람만 많고 예쁜 옷은 없었다. 3호점은 결국 못 찾고 그냥 시청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다가 문득 ‘버스 타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정류장으로 갔다.

72번 버스. 블로그에서 본 새빨간 라인의 주요 노선버스였다. 시청 역이 종점이었다. 나비고 카드를 찍고 기사 반대편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탄 파리의 버스는 훌륭했다. 오픈 투어버스 저리 가라였다. 그냥 가는 곳곳마다 다 관광지고 명소니 저절로 투어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에펠탑 앞에 내려 센 강으로 내려가 그놈의 알렉산더 3세 다리까지 걸어간 뒤 앙발리드에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를 익히면 자주 이용해야지. 한국에선 차도 막히고 불량스러운 운전사가 많아서 버스 이용이 꺼려졌는데, 이곳에선 지하철만 타는 게 오히려 손해 보는 느낌이다. 파리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편히 앉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집에 들어오기 전 프랑프리에 들려 달걀과 맥주 4캔을 샀다. 아마 하숙집에 들어갈 때까지 이곳의 맥주를 종류별로 다 마셔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냥 하루에 두 캔 마실까? 저녁으로는 새싹비빔밥을 해 먹고, 지금은 ‘80 royal club’이라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이건 아마 다신 안 마실 듯. 맛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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