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목표

파리의 안나 31

by Anna

한 달이다!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왜인지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7시에 울린 알람에 눈을 뜨니 무지하게 피곤했다. 결국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이렇게 피곤할 바엔 다시 자자는 마음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서 일어난 시간은 오전 11시. 어제와 다를 바 없구나. 한 달이고 뭐고 혼자 살면 게으름과 친구가 되는 거구나. 그래도 조금은 더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언제나 그렇듯 노트북을 켰다. 내 삼성 노트북. 너 없으면 나 못 살아.


오늘의 세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첫째는 ‘까르네 사기’ 둘째는 ‘몽쥬약국 가기’ 셋째는 ‘현금 인출’이었다. 먼저 몽쥬에 가려고 씻고 화장하고 준비를 끝마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모레 이사 가는데 짐만 더 늘리는 거 아닌가?’ 내가 살 것은 바이오더마 클렌징 워터. 500ml짜리 두 개를 살 예정인데 1L가 그리 큰 양과 무게는 아니지만 캐리어 자리도 차지하고 왠지 손해 같았다. 현재 사는 집과 가까워 한 번 걸어가 볼 속셈이었는데 오늘은 비도 오는 구질구질한 날씨고 어차피 다음 달엔 나비고 한 달권을 끊을 예정이라서 지하철 타고 오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두 번째는 미루기로 했다.


쌀이 다 떨어져서 저녁에 먹을 밥이 없는데 그냥 집 앞 프랑프리에서 살 속셈으로 첫 번째 ‘까르네 사기’도 미루려고 했다. 어차피 역까지 가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리고 세 번째 현금인출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음 달 하숙비는 300유로. 현재 현금은 200유로가 있지만 생활비를 써야 하니 100유로만 쓰고, 200유로를 찾을 셈이었다. 보증금 100유로도 있지만 그건 전부 다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은 잘 모르니까.


그런데 유랑이나 프잘사에서 본 여러 인출 후기 글 때문에 엄청 겁을 먹은 상태였다. 돈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집시나 거지들의 행패나, 기계가 카드를 먹고 돌려주지 않는 황당한 경우나, 카드는 뱉었는데 돈은 안 나오는 답답한 사건들 말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 중 그들은 극히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집에서 나와 은행까지 가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오늘따라 동네에도 사람이 바글바글. 하필이면 역 주변 사거리에 은행이 죄다 몰려있어서 돈을 찾으려면 그들 사이에서 카드를 넣어야 했다. 원래 가려던 LCL 앞에는 딱 봐도 시비 걸 것 같은 노숙자가 앉아있어서 포기. 건너편에 있는 이름 모를 은행은 ATM 기계가 두 개나 있었지만 코너에 붙어 있기에 위험해 보여서 포기.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어떡하지’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하. 이건 오늘 돈을 찾지 말라는 신의 계시야! 위험 신호를 보내는 거야! 내일 찾아도 되잖아? 아니면 내일모레? 이렇게 나의 겁을 혼자 합리화하고 발걸음을 돌려 까르푸에 갔다.


사실 거기가 까르푸인지는 오늘 알았다. 가서 납작 복숭아를 사고, 쌀을 찾는데 안 보였다. 우유도 사려니까 비쌌다. 그래서 그냥 복숭아만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쌀도 사야 되고, 꿀꿀하니까 삼겹살이나 구워 먹어야지 하고 불어 사전에 삼겹살을 쳐서 단어를 알아낸 뒤 다시 집을 나섰다. 어차피 지하철을 타야 하니 까르네는 사기로 했다. 결국 첫 번째 계획만 실행한 셈이다.

티켓 t 10장을 누르고 카드결제를 한 뒤 영수증 받기까지 눌렀더니 까르네 10장이 나왔다. 10장이 맞는지 세보고, 맞기에 한 장을 기계에 넣고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영수증을 안 받았다. 다시 나가면 까르네 한 장을 그냥 버리는 거다. 하. 내 카드 영수증! 혹시 그 영수증으로 내 정보를 알아내서 카드를 복사하거나 나에게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까 엄청난 걱정이 들었다. 현금 인출과 카드 영수증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내가 주변 사람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오늘따라 다들 불친절한 것 같아. 발을 밝고 가도, 우산으로 치고 가도, 사과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트에 가서 장보기를 즐길 새도 없이 그냥 삼겹살 제일 싼 거 골라 담고, 우유 고르고, 쌀을 담아 계산하고 집으로 왔다.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구질구질 내리는 중. 제발 기계 밑에 내 카드 영수증이 남아 있길 바라며 고블랑 역으로 갔다.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발권 중인 사람들의 발밑을 살폈지만 보이는 건 1.70유로짜리 티켓 t 한 장 영수증뿐. 내 건 없었다. 누가 주워 다 버린 건가? 말도 안 돼. 누가 가져간 건가? 아니 왜? 차근차근 침착하게 했으면 이럴 일 없었을 텐데, 현금 인출 때문에 겁먹고 카드 결제 자체도 걱정이 되어서 서두르다 보니 괜한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별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매우 찝찝하다.

집에 와서 발을 닦고 우선 배가 고프니 밥부터 했다. 삼겹살도 굽고 마늘도 굽고 김치도 굽고, 나 밥 하나는 정말 잘 먹고사는 거 같다. 섣부른 걱정하지 말고 내일은 꼭 침착하게 현금 인출에 성공할 거다. 한 달 동안 정말 잘 살았다. 앞으로 더 잘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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