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무 수행

파리의 안나 33

by Anna

하숙집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예정대로라면 8/1 날 이사지만 할아버지께서 미리 와서 지내도 좋다고 하셨다. 짐 문제도 있고 미리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알았다고 말씀드렸다. 10시쯤 일어나서 씻고, 빨래 돌리고, 시리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뒤 짐을 챙겼다. 우선 오늘은 캐리어 하나와 백팩을 메고 갈 예정이었다. 2시까지 하숙집으로 찾아가야 해서 12시 50분쯤 집을 나섰다. 저번보단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이지만 그래 봤자 21kg에서 20.5kg으로 줄은 정도라 크게 차이 나진 않았다.


6호선이 공사 중이라 고블랑에서 ‘Pasteur’ 역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2번이나 환승해야 했다. 버스를 타면 몽파르나스 타워까지는 갈 수 있는데 그곳에서 집까지 찾아가는 길을 모르므로 그냥 사서 고생하기로 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올라갈 때가 지옥이었다. 첫 번째 환승할 때 착한 아주머니께서 도와주셨는데 하필이면 내려갈 때여서 조금 아쉬웠다. 웃긴 게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계단을 만든 거지? 그냥 평지로 만들면 될 것을 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또 환승구간에 사람도 별로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으악 이건 꿈이야!” 올라가는 계단이 나올 때마다 저렇게 소리 지르며 캐리어를 들었다.


겨우 도착한 파스퇴흐. 다행히 역에서 나와 쭉 걸었더니 59번 집이 나왔다. 알려 주신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shin-kim’ 인터폰을 호출하니 두 번째 문도 열렸다. 자취집보다 훨씬 넓고 고급스러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렸더니 활짝 열린 문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리고 우선 음식 해주는 민향 언니의 방에서 하루 지내기로 해 그곳에 짐을 두었다. 언니는 편히 쉬라고 했지만 아직은 낯설고 어색해서 편하진 않았다. 언니가 나를 위해 침대 커버를 빨고 다림질까지 해주셨다고 해서 감동이었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5시쯤 외출하셔서 혼자 누워서 쉬었다.

앞으로 내가 쓸 방에서 지내던 분은 열심히 짐을 싸고 있었다. 1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짐이 어마어마할 것 같다. 나에게 비워둔 곳은 먼저 짐을 풀어도 좋다고 하셨지만, 내일 언니가 나가면 싹 다 청소하고 진행할 예정이라 그냥 두었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시리얼로 한 끼를 때운 내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배가 고파 부엌에서 어슬렁거리다 언니에게 소일거리를 떠맡게 되었다. 떡국 떡에 곰팡이가 조금 피었는데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는 일이었다. 그냥 버리지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시킨 일이니 열심히 했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와 치킨! 파스타는 조금 짜긴 했지만 맛있었고, 치킨은 예술이었다. 내가 닭고기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리자 평소 식사량이 적으신 할아버지께서 본인의 닭다리도 양보하셨다. 워낙 배가 고프기도 했고 너무 맛있어서 싹 다 해치우니 나보고 잘 먹는다고, 내 나이 땐 돌아서면 배고플 거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셨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언니가 동네에서 산책을 하자고 하셔서 따라나섰는데 곧 내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라서 박사님께 전화를 달라고 부탁드리고 밖에 나갔다.


골목 사이사이를 걸으며 정말 또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고, 민향 언니는 잘 들어주셨다. 언니 나이는 45세. 우리 엄마와 동갑이다. 그래도 생각하는 거나 스타일을 봤을 때 아직 30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한참을 돌다가 10시가 가까워지자 연락이 오지 않아서 언니가 먼저 집에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마침 간호조무사가 오셨고, 나름 성공적으로 첫 임무 수행을 완료했다. 언니가 밖에서 기다리실까 봐 열쇠를 들고나갔는데, 어딜 가셨는지 안 보였고 밤이라 눈도 침침했다.


아까 같이 갔던 길로 한 바퀴 돌았는데 언니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집 앞 인도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 10분쯤 기다리다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려고 열쇠로 문을 열었는데 뒤에서 “은지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는 내가 나오지 않자 혼자서 앙발리드까지 갔다 오신 거였다. 내가 조금 기다렸는데 괜찮다고, 피곤하니 들어가서 쉬자고 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히 씻고 12시가 좀 안 된 시간에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부터 8시에 기상해야 한다. 새 나라의 어른이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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