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uze moi

파리의 안나 35

by Anna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멀쩡한 정신이 의심스러워 다시 잠을 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8시 알람에는 비몽사몽이었다. 프랑스는 베개가 정사각형이라 불편한 것 같다. 한국에서 사 온 내 베개 커버는 쓸모가 없어졌다. 아침으로 다양한 과일과 곡물이 들어간 시리얼과 (내가 혼자 살 때 먹었던 것보다 10배는 맛있었다) 비스코트를 먹었다.


오늘의 첫 임무수행 시간은 9시 30분쯤이었다. 아침엔 간호조무사가 할머니의 몸을 닦아 드리는데, 어제 왔던 분보다 훨씬 꼼꼼하게 하셨다. 내가 도울 것도 별로 없었다. 밤새 할머니가 굉장히 많이 분출하셔서 침대 시트까지 조금 젖어 있었다. 내가 비위가 강해서 다행이다. 냄새는 좀 싫었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사히 할머니를 의자로 옮겨드리고 방에서 밀린 일기를 작성했다.

1시쯤 점심을 먹고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나비고 한 달권을 요긴하게 써먹기 위한 외출이었다. 우선 에펠탑이 보였던 곳으로 쭉 내려갔다. 현재 6호선이 공사 중인데 그곳을 따라가면 에펠탑이 나오겠지 하고 무작정 걸었다. 골목 사이사이 상점도 구경하고, 낯선 곳에서의 긴장은 늦추지 않은 채.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말을 걸기에 무시를 하고 갔는데 뒤에서 계속 말소리가 들려서 쳐다보았더니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무서운 마음에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는데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길엔 계속 사람들이 있었고, 혹시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소리치고 도망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Alors, Alors, excuze moi” 뒤에서 나를 계속 부르기에 쳐다보았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으면 받아들이는 의미로 생각할까 봐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본인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뭐라 말을 했다. 내가 non, non 하자 계속 말을 이어갔지만 갑자기 그의 핸드폰에 전화가 와서 무사히 그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가던 길을 계속 가며 그를 쳐다보니 아쉽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자꾸 이상한 사람만 꼬여서 걱정이다.

계속 정처 없이 걷다가 길을 잃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80번 버스를 타고 ‘Ecole militaire’ 역에 내렸는데 에펠탑을 코앞에 두고 이상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깨달은 뒤에는 이미 꽤 걸어온 상태였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에펠탑을 지나 72번 버스를 기다렸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버스의 뒷문으로 탔는데 카드 찍는 곳이 없어서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결국 무임승차한 꼴. 양심에 찔려 알마 역에 내렸다.


몽파르나스 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기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당분간 몽파르나스에 가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발견했다. 결국 지하철을 타고 8호선을 환승하려고 가는데 노선도를 보니 13호선을 타고 ‘몽파르나스 비앙브뉘’ 역에서 갈아타는 게 조금 더 빨랐다. 길을 헷갈려 힘들게 환승을 하고 드디어 파스퇴흐에 내렸는데 이번에는 횡단보도 앞에서 경찰이 막았다. 왜인지 경찰차 수십 대가 눈앞으로 지나갔다. 파리 경찰들은 웬만하면 다 멋있는 것 같다.


집에 도착해서 쉬다가 오후 임무수행을 완료하고, 내일 갈 벼룩시장 정보를 찾아보았다. 6시쯤 갑자기 비가 내리기에 창문을 닫고 있었는데 민향 언니가 그라탕에 쓸 모짜렐라 치즈를 사 오라고 하셨다. 비가 와서 나가기 싫은 마음에 조금 감정 소모를 하다가 금방 그쳐서 할아버지와 함께 프랑프리에 갔다. 저녁으론 그라탕과 떡볶이를 먹었다. 여기 와서 식사량만 늘어나는 것 같다. 내일은 부지런히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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