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36
아침은 어제 먹다 남은 그라탕과 떡볶이였다. 할아버지께서 이제 아침은 스스로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빵이나 시리얼은 항상 구비되어 있으니 내가 배고플 때 알아서 먹으라는 말씀이셨다. 9시까지 기다려서 먹는 아침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알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우유랑 같이 먹으라고 하셔서 컵을 꺼냈는데 기다리라며 분홍색 머그컵을 찾으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찾으시는 분홍색 머그컵은 보이지 않았고, 민향 언니에게 불똥이 튀었다. 할아버지는 컵을 어디에 치웠냐 화를 내시고, 언니는 그런 컵은 보지도 못했다 화를 내고, 나는 가운데 끼여서 눈칫밥을 먹었다. 그냥 아무 컵에나 마시면 되는데 굳이 분홍색 머그컵 때문에 아침부터 열을 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분홍색 머그컵은 못 찾았고, 다른 컵에 마셨다. 불편하게 먹어서 그런지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두 번이나 갔다.
아침 임무수행을 끝내고 몽트뢰유 벼룩시장에 갔다. 오늘로써 파리 3대 벼룩시장은 모두 다 점령! 파리 동쪽 20구에 위치한 곳이라 좀 멀었다. ‘Porte de montreuil’ 역에 내리니 벼룩시장으로 향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각보다 큰 규모였다. 오늘의 목표는 퀵 보드였는데 상태 좋은 물건이 없었다. 구석구석 구경하고 잠시 역 근처 의자에 앉아서 쉬다가 담배 암거래 장면도 목격했다. 무슨 암호 같은 말을 계속하던데 신기했다.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배가 고파 다시 시장으로 들어섰다. 시장으로 이어진 길에 가판대가 많았는데 경찰차가 등장하자 모두들 짐을 싸서 도망을 가더라. 길거리엔 미처 챙기지 못한 옷이나 신발들이 굴러다녔다.
그런데 저 멀리 말이 보였다! 타는 말! 두 명의 경찰이 말을 타고 순찰 중이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할 광경에 몰래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역시 파리 경찰은 멋있어. 시장 초입에서 중고 책들을 팔기에 구경하는데 익숙한 그림이 눈에 띄었다! ‘Le petit prince’ 반가운 마음에 덥석 집었는데 뒤에 붙여진 가격표를 보니 ‘6유로 18’이었다. 책도 작고 얇은데 6유로라니. 중고니까 더 싸지 않을까 싶어 손에 쥔 채 다른 책들을 구경하는데 마침 옆에 있던 손님이 다른 책의 가격을 물어봤다. 마담은 2유로라고 답했다. 2유로 정도면 살 만하다는 생각에 다른 책들을 구경하는데 한 아저씨가 오더니 1유로로 가격을 협상하려다 실패하는 것도 보았다. 난 예의 바르게 가격을 묻고, 2유로를 지불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시장 안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줄도 너무 길고, 생각보다 샌드위치가 비싸서 다시 역 근처로 갔다. 빵집이라도 찾아보려고 횡단보도를 건너갔는데 음식점 몇 곳이 눈에 띄었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기엔 동네 분위기가 무서워서 그냥 줄을 길게 서있는 곳에 합류했다.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내 불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하나 달라고 했다. 궁금했던 가격은 2유로였다. 피자 모양의 샌드위치였는데 꽤 먹을 만했다. 트램 정거장에 앉아 식사를 해결하고 쉬는데 한 할머니가 오시더니 “마드모아젤, 담배 좀 피워도 될까?” 하셔서 그러라고 했다. “중국인? 일본인?”하셔서 “한국인”이라고 말씀드리니 이 동네엔 중국이나 일본인이 많다고 하셨다. 꽤 독한 담배를 피우시기에 예의상 조금 앉아 있다가 지하철을 타러 갔다.
9호선을 타고 쭉 가서 트로카데로에 내렸다. 샤요궁에서 에펠탑 사진을 찍는데 외국인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래서 두 장 찍어주고, 나도 잔디밭에 내려가 어린 왕자 책 사진을 찍었다. 7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시청역에 내렸는데 시청 앞에서 비치볼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진 몇 장 찍고 프리피스타에 갔는데 2호점은 남자 바지가 주였고, 1호점은 겨울 재킷들뿐이라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지하철로 향했다.
콩코르드 역에서 12호선으로 갈아타는 와중에 또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을 걸었다. 지하철 안에서도 혼자 여행 온 동양인이 사진을 찍어 달래서 여러 장 찍어 주었다.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사진 찍기란 참 어려웠다. 집에 도착하니 선생님은 TV를 보고 계셨고 할아버지와 언니는 자는지 조용했다. “다녀왔습니다.”하니 “학교 다녀오니?” 하셔서 “놀고 왔어요.”했더니 “너희들은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데 나는 매일 여기 누워만 있으니 속상해.”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얼른 나아서 같이 놀러 가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오늘 다녀온 벼룩시장 이야기도 해드리고 어린 왕자 책을 보여드렸더니 좋아하셨다.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께 읽어드리기로 약속하고 방에 와서 쉬었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다. 휴대폰 배터리를 바꿨는데 갑자기 2007년 2월 1일 목요일로 나와서 멘붕이 왔다. 드디어 수명을 다 한 건가. 카톡을 하다가 잠깐 기다린다는 게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5시 40분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간호조무사가 늦게 와서 다행이었다. 6시쯤 임무 수행을 마치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샤워를 했다. 저녁을 먹고 사진을 정리하고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는 중이다. 내일은 몽쥬 약국에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