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34
8월이다. 임무수행을 위해 8시에 일어났다. 먼저 혈당을 체크하는 간호사가 왔고, 8시 30분쯤 간호조무사가 방문했다. 물을 떠다 놓고 그녀의 바디 랭귀지를 해석하며 열심히 도왔다. 아침에는 할머니의 몸도 닦아주기 때문에 시간이 좀 더 소요된다.
아침 식사는 빵과 사과였다. 1인당 베이글 두 개였는데 할아버지께서 하나만 드시고, 나머지 하나는 나에게 주셨다. 배가 불렀지만 음식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 열심히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할아버지와 유로 마트에 갔다. 할머니의 나비고를 얻어서 88번 버스를 타고 한 10분 정도 갔는데 할 말이 없어서 좀 어색했다.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안녕.” 하시고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 하시는데 왜 초면에 반말을 하는 거지. 난 “Bonjour” 했다. 민향 언니가 사 오라고 적어주신 것들을 담고 계산을 하는데 나보고 프랑스에 왜 왔냐고 물어보셨다. 살려고 왔다니까 워킹으로 온 거면 놀러 왔다고 말해야지, 하셨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첫인상부터 별로 안 좋던 유로 마트였다.
집까지 오는데 꽤 무거워서 ‘괜히 따라나섰나’라는 생각과 ‘할아버지 혼자 오셨으면 힘드셨겠네.’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제 짐을 옮기느라 팔에 알기 배기고 어깨가 쑤셨다. 잠깐 통화를 하고 한시 반쯤 점심을 먹었다. 점심 메뉴는 보쌈. 오븐으로 구운 보쌈은 맛있었다. 밥을 한가득 주셔서 이걸 어떻게 먹지, 걱정했는데 먹다 보니 또 다 비웠다.
배불리 먹고 나머지 캐리어 하나를 가지러 고블랑에 갔다.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나비고 1-2 존 한 달권을 충전했다. 날씨가 더워서 집이 찜통이었다. 창문을 열고 이불 빨래를 걷어서 개어둔 뒤 청소를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일요일마다 청소를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더러웠을 거다. 바닥을 쓸고, 걸레로 닦고, 쓰레기를 비우고 내 물건들을 정리한 뒤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91번 버스를 타면 몽파르나스 역까지 간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짐을 들고 타기가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종점에 내리니 저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에펠탑이 보이다니, 내가 잘 못 내린 건가? 싶었지만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지도를 보니 아래로 내려가면 파스퇴흐 집이었다. 하숙집에서 에펠탑이 이렇게 가깝다니. 열심히 짐을 끌고 내려가 집에 도착해서 비어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우선 캐리어 두 개와 백팩을 한쪽에 몰아 놓고 저녁에 청소를 한 뒤 짐을 풀 예정이었다. 5시쯤 임무 수행을 마치고, 다시 고블랑 집으로 향했다. 7시쯤 집 중개인 언니를 만나 열쇠를 주고,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 다신 오지 않을 이 동네를 기억하기 위해 가는 길에 곳곳 사진을 찍었고, 집에 남아 있던 내 물건들을 챙긴 뒤 언니를 기다렸다. 6시 40분쯤 언니를 만나 간단히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깨끗한 집 상태를 보여주고 열쇠와 보증금을 교환했다. 물이 새는 바깥 화장실은 언니가 청소 아저씨께 메모를 남김으로써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게 되었다. 언니는 교회를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고, 나는 인사를 드리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도착하니 마침 저녁 식사 전이셔서 같이 앉아 냉면을 먹고, 후식으로는 타르트 반쪽과 비스코트를 먹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간단히 방청소를 하고 짐을 풀었다. 완전히 다 채워 넣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짐을 푸니 이제 진정한 내 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0시쯤 임무수행 후 샤워를 하고 하루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