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거 없네

파리의 안나 32

by Anna

날씨가 좋았다. 환율도 내렸다. 1시쯤 열쇠와 카드를 들고 집을 나섰다. 잠옷 바지에 남방 하나 걸쳐 입고 삼선 슬리퍼 직직 끌며 누가 봐도 이곳 동네 주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근데 막상 나가니까 내 모습이 제일 추레해 보여서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LCL 현금 인출기로 갔다. 언어는 영어를 선택하고, 비밀번호 누르고, 화면엔 200유로가 없어서 따로 입력한 뒤 조금 기다리니 영수증을 받겠냐고 물었다. 잠시 후 카드와 영수증, 현금이 나왔다. 금액이 맞는지 세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불안한 마음에 우선 지갑에 쑤셔 박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별 거 없네. 쉬운 일이네.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도 가벼웠다.

집에 도착해서 금액이 세어보니 20유로 6장과 10유로 8장. 딱 200유로가 맞았다. 50유로짜리로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단위가 인출되어 신기했다. 내일 하숙비 드릴 때는 좀 불편할 것 같다. 큰 단위가 드리기 편한데 말이다.

어쨌든 현금 인출도 성공했고 기분 좋게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저번에 사놓고 포장을 뜯지도 않은 감자를 껍질 벗기고 채칼로 썰어서 감자볶음에 도전했다. 한국에서 만들었을 때보다 재료는 부족했지만 맛은 훨씬 좋았다. 그냥 감자만 먹기엔 밍밍할 것 같아서 남은 김치도 조금 볶았다. 저녁엔 어제 먹고 남은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배불리 먹고 8시쯤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일요일 날 동주한테 빌린 바람막이도 가져다 줄 겸 루브르 야경도 볼 겸해서 말이다. 27번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가고 싶었지만 무려 23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 조금 서 있다가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탔다. ‘Châtelet’ 역에서 환승하기란 참 힘들다. 내일이면 공사로 아예 7호선은 이용하지 못한다. 한참을 걸어 1호선으로 환승을 했고, 루브르 역에서 내렸다. 피라미드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대체 어디가 앞인지. 한 바퀴 빙 돌고 혼자 앉아 사진을 찍다가 한 5분쯤 지나서 저 멀리 얼굴이 퉁퉁 부은 동주가 나타났고, 바람막이를 돌려줬다. 감기가 심해져서 학원도 안 가고 15시간을 잤다고 한다.

점점 어두워지기에 루브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와인을 마시기 위해 튈르리로 향했다. 멀리 에펠탑 윗부분이 보였다. 사실 오늘 만난 건 순전히 바람막이 때문이라서 다른 일행까지 네 명이서 할 얘기도 없었고 분위기도 별로였다. 게다가 난 일요일 밤 이미 그들에게 마음을 정리한 상태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자 동주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봤다. 결국 가까운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할 현재 나의 심리상태에 대해 털어놓았고, 딱히 답을 바란 게 아니라 그냥 혼자 이야기의 매듭을 지었다.

재미없는 시간이 흐르고, 집에 가면서 참 나란 사람의 감정이 웃기게도 느껴졌다. 혼자 정들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정리하고. 처음부터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생애 첫 번개로 인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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