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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Apr 27. 2021

여기나 저기나 청춘은 고달프다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4 다시 Buenos aires

밤늦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왔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플로리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었다. 남미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보통 대부분 남미의 도시들은 9시가 넘으면 사람들이 거의 안 돌아다닌다. 하지만 식당에는 사람들이 저녁을 먹느라 북적인다. 남미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도 다른 거리는 한산한데 플로리다 거리는 다른 세상 같았다.


나는 곧바로 숙소로 들어갔다. 로비가 바(Bar)로 변해 있었다. 카운터로 가서 내일 아침 식사를 신청하고 카운터 옆 자리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부르며 인사했다. '나를 아는 척하며 인사할 사람은 없는데'하며 옆으로 돌아봤더니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가 웃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냥 인사한 거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올라'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남미 사람들은 정말 인사성이 밝아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구처럼 인사하는 경향이 있다.) 별로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약간 거리의 여자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시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계속 아는 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사실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어리둥절해하며 대꾸를 안 했는데, 몇 마디 덧붙이며 나를 빤히 본 그녀는 낮에 나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여자였다. 낮에는 부스스했던 그녀가 진하게 화장하고 별로 가린 부분이 없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이다.(사실 더 긴 이름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마리아라는 이름뿐이다.) 마리아는 아르헨티나 남부의 어느 시골 출신이다. 취직하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왔는데 두 달 넘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청소하는 일이나 식당에서도 짧게 일은 했지만 꾸준히 일 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했다. 구직활동을 하는 동안 밤에는 이렇게 화장을 하고 놀러(?)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정말 놀러 나온 것인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건 나의 편견이자 오해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사람들이 모이긴 했는데, 외국인 여행객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모두 마리아와 비슷한 사정의 아르헨티나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이 빠르게 주고받는 스페인어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마리아 옆에는 줄곧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는데, 마리아는 가끔 그 남자에게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 끊임없이 웃어댔다. 나는 그들과 맥주를 몇 병 나눠마시고 자정이 되기 전에 방으로 올라왔다. 새벽녘에 마리아는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 잤다.




피곤했지만 잠이 안 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날씨가 화창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보는 파란 하늘이었다. 딱히 할 것 없는 하루지만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숨을 푸푸 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 식사하러 내려가는 김에 체크아웃하고 짐을 카운터에 맡기려고 최대한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짐을 빼 나왔다. 사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기도 했다. 하룻밤이기에 망정이지...


화창한 날씨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산뜻하고 경쾌함마저 느껴졌다. 오늘은 하루 종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돌아다닐 예정이다. 지난번에 가지 못했던 미술관에도 가고, 산텔모 식당에도 다시 가고, 지난번에 못 가봐서 아쉬웠던 곳들도 여유롭게 다녀 볼 예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아졸라 극장에 가서 공연도 보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엘 칼라파테로 가는 것이 오늘 일정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여러 번 왔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의 오벨리스크는 처음 본다. 'B A'라고 새겨놓은 나무 조경도 처음 보았다. 구경 온 사람들 모두 들뜨고 신나 보였다. 나도 신나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잘 찍지 않는 셀카까지 찍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태양은 뜨거웠지만 골목길도 도로도 모든 곳이 산뜻해 보였다.


점심을 먹으러 산텔모 시장으로 갔다. 산텔모 시장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사실 하루 종일 그 안에서 놀아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는 물건들과 먹거리가 많다. 오늘은 지난번에 줄이 길어서 먹지 못했던 아사도(남미식 스테이크) 집으로 가서 스테이크와 소시지를 먹었다. 줄이 길었지만 혼자여서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렸다. 흑맥주와 아르헨티나 아사도를 먹으니 찰떡궁합이었다. 점심을 먹고 산텔모 시장 곳곳을 다니며 소소하게 쇼핑을 했다. 싱싱한 과일과 주렁주렁 달린 각종 소시지와 치즈도 사고 싶었으나 여행객에게는 짐이 될 뿐이라 살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책방에서 짐이 되지 않는 소소한 것들로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 나왔다.



산텔모 시장 주변에 벼룩시장 같은 것이 열렸다. 길가에 즐비하게 물건들을 깔아 두고 팔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하긴 괜찮은데 사고 싶을 만큼 멋진 물건들은 없었다. 탱고 음악이 들리는 쪽으로 갔더니 작은 공원 한편에서 남녀가 탱고를 추고 있었다. 옷도 멋지게 빼입고 화려한 실력으로 넋 놓게 만들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걷다 보면 이렇게 길거리에서 탱고를 추는 댄서들을 자주 보게 된다. 탱고 버스킹 같은 느낌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 중에 또 다른 한 곳은 Bar Sur이다. 밤에 탱고 공연도 볼 수 있고 배워 볼 수도 있는 곳이라고 했다. 탱고바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골목을 천천히 걷다가 카페 하바나(HABANA, 아르헨티나에서 특히 커피전문점 하바나를 많이 보았다.)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정말 여유롭게 부에노스의 골목을 음미하며 걸었다. 바 수르에 도착했을 땐 7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 입구에서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데 노신사 웨이터가 와서 인사했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 웨이터. 친절하게도 그는 아직 오픈 전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예약을 했느냐고도 물었다. 아... 이곳은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밤늦게 시작하는 곳이었다. 그가 설명하길 공연 전에 맥주는 마실 수 있겠지만 보다시피 아직 오픈 전이라고, 예약하고 나중에 어두워지면 오는 게 좋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Bar라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바 내부도 잠깐 보여주며 사진 찍는 것도 허락해 주었고 너그러운 미소로 포즈도 취해주셨다.



아쉽게 이번에도 바 수르에서 공연 보는 것은 포기했다. 오늘 밤 10시에 하는 피아졸라 극장의 탱고 공연을 이미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탱고 공연은 보통 그렇게 밤늦게 시작하나 보다. Bar에서든 극장에서든. 그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하루에 탱고 공연 Bar 두 곳을 가기에는 실질적으로 무리이다. 지난번에 친구와 왔을 때는 카페 토토니에서 탱고를 봤다. 그때도 연주자들이 모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어서 놀랐었다. 토토니의 탱고 공연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내레이션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중간중간 나와서 스토리를 읊어주고 노래도 했다. 정확히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애절하고 끈끈한 사랑과 삶의 고달픔을 탱고로 이겨내는 듯한 이야기였다. 그 탱고 공연을 보고 무한한 감동이 일었지만 마음 한편이 애잔해졌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골목을 배회하며 다녔다. 해가 길어서 8시가 넘어서야 해가 졌다. 여자의 다리 근처에 야경을 보러 젊은이들이 모였고, 나는 잠시 그들 사이에 있다가 탱고 음악으로 가장 유명한, 피아졸라의 음악으로 탱고 공연을 하는 피아졸라 극장으로 갔다. 입구부터가 오페라 극장 같은 분위기에 피아졸라로 모든 것을 꾸며 놓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데, 가격도 싸지 않았고 고급진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나는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와인을 한 병 시켰다. 홀은 사람들로 꽉 찼고 공연 전에 음식이 서빙되었고 모두 먹고 마시고 떠드느라 시끄러웠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니까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연 관람이 일상인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공연 에티켓은 최고였다.


카페 토토니 공연도 좋았지만 그곳에 비해 피아졸라 극장은 스케일이 방대해 악단의 규모가 컸고 댄서들도 많았다. 무대도 컸고 오페라 극장 같은 분위기도 좋았다. 역시 스토리를 이어서 공연해 다양한 탱고 무대를 볼 수 있었고, 탱고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피아졸라의 곡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피날레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블리비온'의 반도네온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공연은 1시간 반 정도 했다. 극장에서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 나왔다. 숙소로 가서 짐을 찾아 이제 공항으로 가야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했지만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놀아서 그런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플로리다 거리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다니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이 늦은 시간에도 어린 친구들이 삼삼오오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호스텔로 올라가서 배낭을 찾고 잠시 쉬고 있는데 마리아가 왔다. 어제와 다른 삐쩍 마른 남자와 함께 였다. 그녀는 내 배낭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 시간에 떠나는 거야? 어디로?"

"3시에 엘 칼라파테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 공항 가는 버스 타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부럽다는 둥 좋겠다는 둥 자기는 아직 엘 칼라파테에 가보지 못했다는 둥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오늘도 화장을 진하게 하고 어제처럼 가린 부분이 많지 않은 끈 나시를 입고 있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저렇게 화장하고 술 마시고 노느라 언제 구직활동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구보다 절망적인 것은 그녀일 것이다.


마리아는 한사코 그 삐쩍 마른 남자와 배웅을 해주겠다며 버스 정류장까지 동행했다. 새벽이니 위험하다며 그 남자를 보디가드 삼아 따라나섰다. 대부분 술 취해 흐느적거리는 젊은이들이었지만 다행히도 거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그녀와 기념 촬영도 하고 진한 포옹으로 마무리했다. 버스에 오르는 것까지 보고 손을 흔들어 주는 그녀는 정 많은 친구 같기도 했고 측은한 시골 처녀 같기도 했다.  


새벽 시간인데도 버스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한 잔씩 한듯한 냄새를 풍기며 좀 들떠보였다. 신기하게도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타는 바람에 정말 만원 버스가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까 봐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배낭 내리는 것을 도와준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 공항에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사실 이 새벽 시간에는 대부분 택시를 타지 버스를 이용해서 공항에 가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이 버스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는 모두 클럽에 가는 거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새벽 한 시에 버스를 타고 클럽을 가다니... 새벽 한 시에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는 것만큼이나 희한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젊은이들이었고 삼삼오오 패거리를 이루어 낄낄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이들도 보이는 걸로 보아 모두 바에서 한 잔씩 예열(?)을 하고 클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항과 가까운 어느 정류장에서 우르르 내렸다.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궁전풍의 건물들에서 조명이 번쩍 번쩍이고 있었다. 길을 건너 번쩍이는 클럽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마리아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들도 고민이 깊고 걱정이 태산일 테지만, 오늘은 오늘이고 불안한 내일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이 부디 청춘의 삶이 고달프다하여 함부로 살지 않기를, 지난하고 고단한 삶에 쉽게 지치지 않기를 휘청이며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내린 뒤에 휑해진 버스는 다른 공간 같았다. 그 텅 빈 공간에서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었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비워낼 것도 덜어낼 것도 없었던 나의 20대, 채울 게 없어서 술만 꾸역꾸역 채워 넣었던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한 때의 나 같은, 휘청이며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이 많아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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