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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Oct 06. 2021

구면이지만 내면은 초면입니다

쿠바 속으로 #7. Cien fuegos - Giron

트리니다드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마지막으로 동네 산책을 했다. 그날은 오전에 버스를 타고 시엔푸에고스에 들렀다가 오후에 히론으로 가야 했다. 물론 버스는 모두 미리 예약을 했기 때문에 시간 맞춰 타기만 하면 되었다. 산책을 마치고 짐을 가지러 숙소에 갔다. D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가 왜 낮잠이 많은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는 정말 클럽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나는 이제껏 그만큼 클럽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조심스레 짐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오니 K가 짐을 들고 우리 숙소로 건너왔다. 그녀는 내일 하바나로 갔다가 모레 쿠바를 떠난다고 했다. 그녀의 룸메이트인 L이 오늘 떠나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D와 방을 같이 쓰기 위해 내가 쓰던 침대에 짐을 놓았다. 우리의 대화 소리에 D가 일어나서 간단히 작별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쿠바에서 첫날부터 함께 했던 K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남미를 여행하는 중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녀는 4개월이나 더 여행을 이어갈 것이기에 남미 어디선가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메로 아저씨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때마침 L도 만나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L은 어제까지 결정하지 못했던 히론행을 오늘 아침에 결정하고 버스터미널에 가서 오후 버스를 예약하고 왔다고 했다. 우리는 히론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며칠을 즐겁게 동거 동락한 동행들과 헤어져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나는 발걸음이 허전했다. 왠지 D가 트렁크를 끌고 툴툴거리며 따라올 것만 같았다. 


시엔푸에고스에 가는 목적은 딱히 없었다. 트리니다드와 히론 중간쯤에 있는 도시여서 근교 투어로도 많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반나절 정도면 다 돌아볼 정도로 규모도 작고 볼거리도 없는 아주 평범한 도시였다. (사실 나는 루트를 짜다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생각으로 먼저 버스표를 예매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을 바꾸고 버스표를 취소하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같은 날 오후에 히론 가는 버스를 다시 예약했다.) 시엔푸에고스라는 이름은 쿠바 혁명에 지대한 공을 세운 혁명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 같았다. 시엔푸에고스도 체 게바라만큼이나 쿠바인들의 가슴에 남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버스는 12시가 조금 넘어 시엔푸에고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짐을 맡기고 작은 배낭만 메고 시내를 향해 걸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건조한 날씨였다. 트리니다드보다 더 덥고 건조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중앙 공원 근처에 있는 박물관의 문이 닫혀 있었다. 무료 전시회장 같은 곳이 열려있어 기웃거렸더니 직원이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 이후에는 딱히 할 것이 없어서 공원 근처를 돌아다니며 상점을 기웃거렸다. 유독 그림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그림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딱 마음에 드는 작은 그림을 발견했다. 캔버스 유화였지만 B5 정도의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 쿠바 여인을 그려놓은 그림이었는데, 쿠바 여자 특유의 그런 감성이 잘 느껴졌다. 흥정도 아주 쉬웠다. 상점 직원이 부른 가격은 처음에 10 쿡이었는데 내가 5 쿡으로 해달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한 통하더니 바로 5 쿡에 가져가라고 했다. 



시엔푸에고스에도 말레꼰이라 부르는 방파제가 있는 해변이 있었는데 한낮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맑은 하늘에 태양이 이글거려서 너무 뜨거웠다. 그늘이 없는 곳이어서 오래 있지는 못하겠다 싶어서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꼬마들이 나타났다. 네 명의 꼬마들은 마르고 꼬질꼬질했다. 그중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가장 큰 아이가 나에게 손을 벌리며 돈을 달랬다. 나는 돈 대신에 가방에 있던 과자를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다. 돈이 없다는 내 말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던 아이들은 과자를 받아 들고 낮게 고맙다고 읊조리고는 방파제 사이의 그늘로 기어들어갔다. 그들은 잠시 후에 다시 나와서 길을 건너 사라졌다. 이들은 나중에 또 길에서 마주치긴 했는데 그들의 엄마로 보이는 꼬질꼬질한 노숙자와 함께였다. 


나는 길에서 걸인들에게 절대 돈을 주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지갑을 내어 보이는 행위도 위험하지만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들이 동냥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지기 싫어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도와주는 것은 종국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 없는 구걸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더 나은 것이라 생각한다.


말레꼰을 한 바퀴 돌고 근처 공원의 그늘에 앉아서 쉬다가 다시 거리를 좀 걸었다. 거리와 건물들은 깨끗했다. 관광거리로 보이는 곳에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다. 관광도시라고 해서 관광객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모두 더위를 피해서 어디로 갔는지 사람들이 없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더워서 더 걸어 다니는 것도 무리인 것 같아서 카페를 찾아 들어가 피자와 맥주를 마셨다. 시엔푸에고스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반나절도 안 지났지만 벌써 지루했다. 맥주를 두 병째 마시고 있는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는 아까부터 자꾸 나를 흘깃흘깃 보는 게 느껴졌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그는 영국에서 왔다며, 시엔푸에고스에 일주일째 머물고 있다며 대뜸 자기 숙소 자랑을 했다. 분명히 내 얼굴엔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표정이었을 텐데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내 테이블에 가까이 앉아서 계속 떠들어 댔다. 나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거나 짧게 대구 해주는 것도 지쳐서, 맥주를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할 것은 없는데 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았다. 시엔푸에고스에서 유명하다는 궁전을 찾아 가보다가 다시 말레꼰으로 갔다. 아까와는 반대편의 말레꼰을 지나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떤 꼬마가 나타나서 자기도 찍어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그러다 방파제에 누워서 해맑게 웃으며 또 찍어달랬다. 그러고는 보여 달라더니 만족한 듯 엄지 척을 해주고 가버렸다. 나도 웃으며 찍어줬지만 그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사진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인데, 얼떨결에 찍은 이 사진을 지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진이 시엔푸에고스에서 그나마 잠깐 웃었던 그날의 그 순간을 추억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히론으로 가는 버스는 출발 시간이 20분이나 지나서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제저녁을 같이 먹었던 신혼부부도 있었고, J와 코토, L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L 옆에는 처음 보는 한국인 여자가 타고 있었고 그 외에도 몇 명이 더 한국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히론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거라서 숙소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긴 했는데 이중에 누구라도 한 명쯤은 동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양이 물들어 갈 무렵에 우리는 히론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각종 호객꾼들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호스텔, 올드카, 자전거 택시 등의 호객꾼들이 앞다투어 가격을 불러댔다. 특히 민박 호객꾼들이 많았는데 나는 숙소를 잡지 않았기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이 들이미는 사진을 보고는 이내 등을 돌려버렸다. 사진의 숙소는 빨강 아니면 촌스러운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방들이었다. J와 코토가 숙소 찾으러 함께 가자고 했으나, L도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L과 다 함께 숙소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J와 코토는 끈질긴 호객꾼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L은 그들의 관계가 수상하다며 함께 다니길 꺼려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길을 걸으며 몇 군데의 민박집의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빈 방이 없었다. 버스에서 L의 옆자리에 앉았던 M은 히론에서 유명한 민박집인 Guanaba's에 미리 예약을 해 둬서 그녀를 데려다주고 방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거기도 없었다. 결국 L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그나마 히론에서 큰 호스텔인 '넬리' 호스텔로 가 보았다. 그러나 거기도 만실이었다. 넬리 아줌마가 옆집을 소개해 주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은 곳이었다. 이미 어둠이 조금씩 깔리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좀 더 쾌적한 곳에서 쉬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 몇 군데의 민박을 거쳐 그나마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의 민박을 구했다. 가격은 다른 곳보다 조금 비쌌지만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아 나설 기력이 없어서 우린 그 집으로 결정하고 짐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주인아저씨가 웰컴 드링크로 모히또를 만들어 주었다. 힘들었던 우리는 두 잔씩이나 원샷으로 마셨다. 한 숨을 돌리고 L과 둘만 남았을 때 갑자기 왠지 어색함이 감돌았다. L과는 하바나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고 트리니다드에서도 저녁을 두 번씩이나 같이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진 않았던 것 같다.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인 L은 말수가 적어서 여럿이 있을 때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내 성격도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라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나도 말을 잘 걸지 않는 편인데, 그나마 나이를 먹으니 이런 낯가림도 둔해져서 나에게도 넉살이란 것이 조금 생겼다. 그래도 똑같은 성격의 사람이 단 둘이 있는 것은 약간의 숨 막힘이 있다. 아무래도 L과 좀 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서 오지랖을 떨어보았다. 우린 구면인데도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신기하리 만치 그녀가 낯설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을 겸 동네 산책을 나갔다. 밖은 이미 캄캄했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길을 맑게 비춰주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는 탓에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나 조명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그러나 그 장식이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기보다는 식당이나 여관의 네온사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마을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고 음식은 그저 그랬다. 밥을 산처럼 쌓아 주어서 놀랐지만 생각보다 밥이 맛있었다. 김치와 오이소박이가 생각나게 하는 밥이었다. 


L과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또 걸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나 나나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이라 중간중간 대화가 끊어졌다. 처음에는 그런 공백이 어색하고 견딜 수 없게 불편했지만 차츰 우린 그 공백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많이 떠들기 위해 노력했고 술기운이 그걸 도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침묵이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가끔씩은 대구마저도 하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있는 내가 주위 사람들은 얼마나 숨 막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과거의 나를 뉘우쳤다. 나는 나름대로 시크함이라고 포장하지만 친절하지 않거나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이런 것들을 깨닫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행을 하며 사유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된다. 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여행을 함으로써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배낭여행을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는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저 스쳐 지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아주 오래 만난 것처럼 친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며칠을 같이 동행을 해도 편해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해도 굳이 친해지기 위해 또는 멀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행 중에 만난 인연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L과 친해지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하기로 했다. 


 이날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서 많은 곳을 다녔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하루 같았다. 쉬지 않고 뭔가를 했지만 따분하고 심심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그저 그런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돌아보고 또 내면의 성장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다면 훌륭한 하루를 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행하는 날 가운데 모든 것이 특별하지않거나 새롭지 않고 그저 그런 날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날에도 여행을 통해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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