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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Sep 30. 2021

우리는 양꼰의 노을에 물들었다

쿠바 속으로 #6. Trinidad 2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얇은 커튼 뒤로 약간의 빛이 비치는 어두운 방에서 건너편 침대를 보니 D가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아침 식사하라고 했다. 벌써 8시가 넘었다. 아침 식사는 7시부터 8시까지라고 했는데 우리가 식사를 하러 가지 않아서 주인아주머니가 깨우러 오신 거였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대충 씻고 D를 깨웠다. D는 클럽에서 놀다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새벽 늦게 들어온 모양으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나는 먼저 2층 식당으로 올라가서 식사를 했다. 9시에 집 앞에서 미야코를 만나서 어제 갔던 승마 투어 집으로 가야 했다. D는 약속시간 15분을 남겨놓고 식당으로 올라왔다. 그가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는 방으로 와서 승마 투어를 할 준비를 하고 나왔다. 이어 D도 내려왔고 우린 서둘러 집 앞 모퉁이로 갔다.


우리는 약속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했고 약속 장소에는 이미 미야코가 와 있었다. 우린 어제 갔던 승마 투어 집으로 곧장 갔다. 주인과 젊은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말 한 마리를 몰고 나왔고 젊은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 우리가 탈 말을 가지러 가야 한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그들을 따라 거의 20분 넘게 걸어갔더니 벌판이 보이는 곳에 마구간이 있는 집이 나왔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탈 말을 만날 수 있었다. 주인이 말에 안장을 얹고는 내게 말의 고삐를 건네주며 나의 말이라고 했다. 말과 인사하라고도 했다. (이름을 알려주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지르르한 갈색 털과 얼굴에 마름모꼴로 흰색 무늬를 가진 말은 한눈에도 잘생겨 보였다. 그리고 너무 크지도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몰고 벌판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승마 투어에 참가하기 위한 여행객들이 각자의 말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전체를 통솔하는 가이드는 없었지만 모두 모여서 함께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말을 책임지고 우리를 이끌어갈 가이드는 자전거를 끌고 오던 그 젊은 남자였다. 말 주인은 우리가 말에 타는 것을 도와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셋과 이 젊은 가이드가 한 팀인 것이었다.


여행객들을 태운 말들이 줄을 지어 출발했다. 처음에는 무섭고 불편했지만 차츰 그 딱딱한 안장에도 적응이 되어 갔다. 말들은 훈련이 잘 되었는지 차분히 줄지어 잘 걸어갔다. 그러나 나의 말은 가끔씩 흥분하여 뛰어가기도 했고 앞지르기를 좋아해서 앞의 말을 제치고 앞서 나가다가 가이드에게 제지를 받거나 혼나기도 했다. 말이 갑자기 빠르게 걷거나 조금이라도 뛰면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가이드는 나에게 그러면 말이 더 빨리 뛸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삐를 당기고 "워워워"라고 하라고 했다. 한국에서 말을 타 본 적은 없지만 말을 다룰 때 "워워워"하는 소리는 들어본 것 같아서 만국 공통어 같았다.


말 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의 재미도 잠시, 30분쯤 타니까 엉덩이가 아프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긴 바지를 입어서 살이 쓸리지는 않았지만 슬리퍼에 반바지를 입고 온 D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산으로 들어갔고 비탈길과 얕은 개울을 건너기도 했고, 흙탕물 웅덩이를 지나기도 하면서 어느 산비탈에 있는 노천카페에 도착했다. 말에게도 휴식을 주고 우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로스팅하고 절구통에 갈아서 바로 내려주는 커피를 마셨다. 시가에 꿀을 발라 주기도 했는데 나는 담배 냄새를 싫어해서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는데... 커피를 마시고 한 숨 돌리는데 멀리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우리의 가이드가 보였다. 내가 그를 돌아보자 카페 주인이 우리에게 말했다.


"저 친구에게도 커피 한 잔 사주지 그래?" 장삿속이 훤히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 좋게 걸려들었다.

"그래. 좋아. 그를 위해 한 잔 줘."


나는 그를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불렀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별로 말이 없는 친구였다. 우리는 엉덩이며 허리며 허벅지가 아프다고 그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휴식을 취한 말과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갔다. 숲이 우거져 그늘이 진한 곳에 말을 세워두고 비탈길을 한참을 올라갔더니 폭포가 흐르는 멋진 계곡이 나왔다. 계곡물은 깊고 넓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폭포 아래로 뛰어들었다. 미야코도 수영복을 안에 입고 와서 옷을 벗고 수영을 했다. D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뛰어들었다. 나는 수영을 못하기에 뛰어들 엄두도 안 났지만 수영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바위 위에 앉아 구경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비록 폭포물에 발 한번 담가보지 못했지만, 푸른 계곡에서 버스킹 무대를 보는 듯하여 나름 즐거웠다.


승마 투어는 폭포에서 내려와 다시 말을 타고 출발지점까지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우리는 정확히 아침에 말에 탔던 지점에서 다시 말에서 내려 각자의 말을 끌고 마구간이 있는 집까지 갔다. 거기에는 말 주인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침보다는 살갑게 우리에게 투어가 어땠냐며 미소 띠며 물었다. 그에게 말을 반납하며 고마운 나의 말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경쟁심과 질투가 강한 말이었지만 똑똑했고 나를 무사히 잘 태워줘서 고마운 말이었다. 말과 헤어지고 우리는 차메로 아저씨네로 향했다. 중간에 미야코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잘했지만 우린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우리는 다시 또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며 헤어졌다.


차메로 아저씨네 호스텔 앞에서 K와 L을 만났다. 우리는 오후에 양꼰 해변에 가기로 약속 했었다. 어제저녁을 함께 먹고 친해진 J와 C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택시가 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기에 나는 숙소에 가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었다. D도 배고파 죽겠다며 뭐든 먹을 만한 것을 찾아 나섰는데, 우리 숙소 바로 옆에 피자 가게가 있어서 별 기대 없이 피자 한 조각을 먹었는데 배가 고파서인지 정말 맛있었다. 알고 보니 거기가 현지인들에게 유명한 맛집인 '모네다 맛집'이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그 피자집에서 피자와 맥주로 배를 채우고 해변에서 마시기 위해 맥주도 몇 캔 샀다. 우리는 낚시를 하기 위해 차메로 아저씨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낚싯대는 아저씨가 준비해 주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 택시 두 대가 차례로 왔다. J가 일본인 여자(사람) 친구인 코토를 데리고 와서 우리는 모두 7명이 되었다. 택시비는 양꼰 해변까지 왕복과 기다려주기까지 포함해서 각 인당 5 쿡씩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택시를 부르고 가격 흥정까지 모든 것은 차메로 아저씨가 해 주었다.


우리는 먼저 낚시를 하러 갔다. 차메로 아저씨가 잘 아는 낚시 스폿이 있다며 우리를 데리고 양꼰 호텔 앞에 있는 도로가의 다리 위로 갔다. 바닷물이긴 했지만 강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각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낚시에 흥미가 없거나 지친 몇 명은 그늘을 찾아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놀았다. 나는 낚시를 포기할 수 없기에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가 그늘에서 낚싯대를 꿰차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낚시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낚시를 했으나 차메로 아저씨를 비롯해 모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마지막에 극적으로 J가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J는 회를 뜰 줄 알아서 그가 회를 떠서 한 점씩 초장에 찍어 먹었다.(J는 이 순간을 위해 초장을 미리 준비했었다.) 어떤 이는 비릿하고 쫄깃한 활어회의 식감에, 또 어떤 이는 매콤하고 새콤한 초장의 맛에 감탄하며 우린 사이좋게 그 이름도 모르는 그 작은 물고기를 한 점씩 먹었다.


차메로 아저씨는 오늘 운이 좋지 않다며 매우 아쉬워하며 낚싯대를 걷었다. 아저씨는 다시 택시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불렀고, 택시는 양꼰 해변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양꼰 해변은 맑고 푸른 바닷물과 부드러운 하얀 모래가 있는 넓고 깨끗한 해수욕장이었다. 해변에는 드문드문 밀짚 파라솔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 카페들도 몇 개 있었다. 해질녘의 양꼰 해변은 잔잔했고 늦여름의 해수욕장 같은 한산함도 있었다.


먼저 J와 코토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뒤이어 D와 C도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무척 시원하고 즐거워 보였으나 나는 K와 L과 함께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서로의 감성을 위해 말을 아꼈다. 그리고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해지는 바다에 드리워질 노을을 기다렸다. 그러나 곧 수영하던 애들이 나와서 방해를 했다. 우린 같이 해변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서로를 바다에 빠뜨리기 위해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자주 한다는 단체 점프샷을 찍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바다는 마법을 부린 것처럼 오렌지 빛으로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 넋 놓고 보다가 너도나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양꼰 해변이 어두워질 때까지 노을 진 해변을 즐겼다. 물론 차메로 아저씨가 몇 번씩이나 돌아가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우린 말괄량이들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정말 가야 한다고 눈썹에 힘을 주어 말했을 때 우린 순한 양들이 되어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저녁식사 준비에 늦었다며 약간 화가 난 듯 보였다. 우리 대부분은 차메로 아저씨네에서 저녁을 먹기로 예약했기 때문에 우리 저녁은 아주 늦게 줘도 된다며 아저씨의 화가 누그러지길 바라며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다시 온화하게 바로 웃으며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오라고 했다.


우린 각자 숙소로 흩어졌다가 다시 저녁 식사하기 위해 차메로 아저씨네에 모였다. 오늘도 위층 아래층으로 많은 사람들이(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이) 차메로 아저씨의 식당에 모여서 랑고스타 구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제 너무 맛있게 먹었기에 오늘 또 먹고 싶어서 예약했다. K와 L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어제저녁을 함께 먹었던 사람들 몇몇과 새로운 신혼부부 커플과 아주 어려 보이는 소녀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J와 코토는 보이지 않았고 D는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늦게 나타나서 칸차라차를 마셨다.


우리는 오늘도 바닷가재 구이요리와 칸차라차를 마시며 다시 쿠바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두 오늘 갔던 양꼰 해변에서 너무 재미있었다고 신나서 떠들었다. 그리고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6개월 동안 유럽과 중남미를 배낭을 메고 다니며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과연 모두가 부러워하는 커플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그들은 실현하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아주 어려 보이는 소녀에게 자꾸 눈길이 갔는데 그녀는 너무 깡마르기도 했고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마셔도 되나 싶을 만큼 어려 보였는데 그녀도 칸차라차를 마시고 있었다. 식사는 모두 같은 접시에 차려져도 각자의 몫이 있기 때문에 개인 접시에 각자의 몫을 덜어가서 먹으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분배된 자신의 몫을 다 먹었는데 유독 그 소녀만은 반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랍스터 요리를 안 좋아해요? 아니면 맛이 좀 그래요?" 약간 걱정이 되어 내가 물었다.

"아니에요. 맛있는데 원래 많이 먹지 못해요. 조금씩 자주 먹는 스타일이라..."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들으며 조용히 있던 소녀가 약간 수줍은 듯 잔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때 테이블에 끼지 못하고 뒤에 앉아있던 D가 갑자기 까마귀처럼 끼어들어서 남긴 음식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모양이었으나 이내 그러라고 하며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나도 적잖이 놀랐으나 D가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의자를 조금씩 당겨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D는 아주 배가 고픈 사람처럼 그녀의 몫을 먹어 치웠다. 분명히 밖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고 했는데 뭔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D가 그녀의 요리를 먹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다행히 K가 내가 제일 궁금해했던 그녀의 나이를 물어봤다. 그녀는 놀랍게도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서 지금 L.A에서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혼자 쿠바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부모님이 이 여행을 허락했어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알고 허락했다고?"

나는 다시 확인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을 수 없었지만 달리 더 할 말도 없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후에 나는 다시 그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나의 조카도 그녀와 비슷한 나이라 신경이 쓰였다. 나는 말을 편하게 하겠다고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모 같은 마음으로 물었다.

"왜 혼자 여행 온 거야? 친구나 뭐 부모님과 같이 올 수도 있지 않아?"

"그냥 혼자 여행하고 싶어서요. 마음 정리도 할 겸..."

"아... 그렇구나. 그래도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시겠다. 전화는 자주 드리니?"

"네."

"그래. 걱정하시지 않게 자주 연락드려. 그리고 항상 조심하고. 쿠바가 외국인에게 호의적이라고 하지만 너무 모든 사람들을 믿고 그러면 안돼.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게 혼자 하는 배낭여행이야."


이런... 그녀와 몇 마디 대화로 나는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 있었다. 열여덟 살의 가냘픈 소녀가 혼자 배낭을 메고 여행을 오다니, 그것도 쿠바에. 나는 자꾸 고등학생인 나의 조카와 그녀가 겹쳐 보여서 마음이 쓰였다. 다행히 그녀는 칸차라차도 두어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음료수만 마셨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는 듯하다가도 또 혼자 있는 듯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날의 저녁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대단히 흥이 많고 말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다던 J가 비빔밥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그의 숙소 부엌에서 코토와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들고 왔다며 맛을 보라며 조금씩 나눠 주었다. 요리사는 아니지만 식당에서 일했다는 그의 비빔밥은 일품이었다. 우리는 술이 부족해서 맥주를 사 와서 더 마시며 떠들고 놀았다. 나중에 출출해질 때쯤 신혼부부가 귀하디 귀한 신라면을 내놓았다. 그걸 또 J가 맛있게 끓여 주었다.


우리는 차메로 아저씨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놀다가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왔다. C 외에는 그곳에서 자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나와야 했다. 밖으로 나와서 D와 C는 오늘도 클럽에 가서 더 놀거라 했고, 그 어린 소녀도 클럽에 가보고 싶다며 따라나섰다. 나는 그녀에게 또! 걱정스러운 당부를 하고 말았다.


"조심해서 다니고, D만 따라다녀. 다른 남자들이 같이 놀자고 해도 무시하고 절대 아무나 따라가면 안 돼. 특히 친절한 쿠바 남자를 조심해!"

그리고 이어서 D에게도 그녀를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D야, 이 아이 혼자 두지 말고 잘 보호해줘. 숙소까지 꼭 데려다주고!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알았지?"

D는 웃으며 알았다고 걱정 말라고 하며 보디가드처럼 그녀를 보호하는 제스처를 하며 웃겼다. 그들은 들뜬 모습으로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술을 더 마시고 싶어서 술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문을 연 식당이나 카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술을 살 수 있는 가게도 없었다. 우리는 흥이 깨지고 약간 지쳐서 술을 더 마시는 것을 포기했다. 신혼부부와 J, 코토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쉬움이 남은 K와 L과 나는 달빛 아래서 산책을 좀 더 하기로 했다. 골목을 걸어 광장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우리 숙소 앞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트리니다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방에 돌아와 보니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자려고 누워서 트리니다드에서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빈 틈 없이 알찬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가지 경험도 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여행이 더 즐거웠다. 하루에 두 가지 액티비티를 하느라 낮에 한적하게 산책을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트리니다드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차메로 아저씨네의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들과 왁자지껄하고 편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늦게까지 놀았던 것은 내 배낭여행 역사상 최초의 일이라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양꼰 해변이 노을에 물들어 갈 때, 그 시간을 함께 감탄하며 즐길 수 있었던 이들이 있어서 더 행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냘픈 소녀에 대한 걱정이 다시 일었다. 클럽에서 별일 없이 잘 놀고 있는지, 어느 쿠바노(쿠바 남자)에게 낚이지나 않았는지, 아니면 여행객에게 부킹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인을 만나면 오지라퍼에 꼰대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녀에게 양꼰해변의 해지는 노을을 보러 가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그녀가 차분히 양꼰 해변의 노을을 본다면 아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 트리니다드를 떠났고 그 이후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던 따사로운 오렌지 빛 노을이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어루만져주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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