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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Sep 22. 2021

단지, 체 게바라를 기리기 위해서

안녕! 나의 쿠바 #4. Santa Clara

신선한 바라데로의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타클라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승객 대부분이 여행객으로 보였고, 좌석도 넉넉해서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에서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출발을 기다렸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승객 몇 명이 더 탔다. 그중에 딱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색하게 인사하던 그는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일본인이냐고 안 물어봐줘서 고맙다며 답했다. 그 청년은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새로운 동행을 만났다. 


20대 중반의 D는 영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6개월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완전히 취준생이 되어 취업 준비만 해서 좋은 직장(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고 했다. 취준생의 지옥으로 일찍 들어가기 싫어서 여행을 좀 더 길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한국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느껴질 압박 때문에 여행을 하면서도 가끔씩 걱정이 되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이 여행이 자신의 인생에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고 했다. 


요즘 20대를 보면 모두 똑 부러지는 데다 생각도 깊어 보인다. 나는 저 나이 때 저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저 나이 때 뭘 했었나 하고 나의 삶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나는 20대에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핑계로 항상 취해 있었고,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표도 없이 방황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렇게 방황하던 20대에 나는 체 게바라에 심취해 있었다. 그땐 체 게바라 자서전이며 평전까지 체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빨간색 표지의 평전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나의 감상을 빼곡히 메모해 놓기도 하고 그 책을 항상 끼고 살았다. 내가 산타클라라에 가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체 게바라의 행적을 찾아보고 그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는 곳에서 잠시라도 그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두 시간 반 후에 버스는 혼잡스러운 산타클라라 터미널에 도착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D와 나는 우선 호스텔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도 나도 예약해둔 호스텔은 없었다. 나는 산타클라라에 1박만 하고 내일 떠날 예정이었으나 D는 하루를 있을지 이틀을 있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선 호스텔부터 찾고 나중에 결정할 거라고 했다. 참 자유분방한 무계획의 여행 그 자체여서 그 여유가 부러웠다. 


우리는 D가 점찍어 둔 호스텔을 찾아갔다. 다행히 비는 그쳤으나 곳곳에 물 웅덩이가 있었고, 흙탕물이 그득한 도로도 있었다. D는 큰 트렁크 하나와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다녔는데, 트렁크 무게도 장난 아닌 듯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 물이 가득 찬 도로나 물웅덩이를 피해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쿠바의 도로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걷다가 몇 번이나 숨찬 소리로 '아! 이 눔의 트렁크!'하고 자신에게 욕하듯 한 마디씩 뱉었다. 아무래도 자유여행에는 트렁크 보다는 배낭이 더 편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느꼈으리라. 



우리가 찾는 호스텔은 터미널에서 꽤 거리가 멀었다. 한참만에 도착한 호스텔은 가정집에서 2층을 민박으로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쿠바에는 이런 민박집이 많다는 것을 이때부터 알게 되었다. 방 하나에는 20 쿡인데 방에는 침대가 두 개씩 있었다. 우리는 한 방을 쓰고 각자 침대를 10 쿡씩 내기로 하고 숙소를 잡았다. D와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워낙 붙임성이 좋은 친구이기도 했고 능청스러운 면도 있어서 대하기 편했고, 방도 작은 도미토리라 생각하면 둘이 쓴다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누나, 점심 뭐 먹을 거예요?" 짐 정리를 하고 D가 물었다. 


딱 봐도 저와는 나이차가 띠동갑은 되어 보일텐데도 그는 아주 능청스럽게 '누나'라는 말을 잘 썼다. 처음엔 조금 얼떨떨했다. 제자뻘 되는 아이가 누나라고 부르니 당혹스럽긴 했으나 곧 적응이 되었다. '아줌마'라고 안 부르는 게 어딘가! 이상하게 20대의 외국인들과는 친구처럼 지내도 괜찮은데 유독 한국인들과는 꼭 서열을 따지게 된다. 그것도 나이로! 이건 유교 교육의 잘못된 예이다. 


점심을 먹기에 조금 이르지만 우린 아침도 못 먹은 터라 점심을 조금 일찍 먹고 바로 체 게바라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내가 산타클라라에 온 목적은 체의 박물관 방문이기에 박물관 외에는 다른 정보는 별로 찾아보지 않았다. 단지 산타클라라의 중앙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비달 공원 주변에 뭐가 많다는 것 빼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에게 주변에서 점심을 먹을 만한 식당을 추천받았다. 이른 점심시간인데도 현지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맛집인 모양이었다. 핫도그나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스테이크처럼 구워서 볶음밥과 파는 곳이었다. 생선구이도 있어서 나는 생선 구이를 먹었다. D가 주문한 것은 'Chuleta Grille'이었는데, 주문할 때 내가 그릴구이일 거라고 설명해주었는데, 그냥 기름에 튀기 듯 구운 거였다. 민망해하는 나에게 그는 아주 맛있다며 만족스럽게 먹었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승리를 거두고 그 기세를 이어 하바나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지였다. 특히 체 게바라가 승리를 한 곳이기 때문에 곳곳에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의 유명한 어록인 'Hasta siempre la victoria (영원한 승리를 위해)'가 골목벽화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피델 카스트로도 빠지지 않았다. 골목마다 그래피티가 없는 골목이 없었으나 동네는 비교적 깨끗했다. 


체 게바라 박물관까지는 멀지 않기에 걸어갔다. 박물관 옆에는 혁명에 참가했던 전사자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묘비명을 보고 나이를 계산해 보니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다. 체의 박물관에는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죽음까지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추모관에는 중앙에 유독 눈에 띄는 노란 별이 있었는데 바로 체 게바라의 무덤이었다. 그의 유골이 실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노랗게 빛나는 별은 체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그 앞에서 체를 위해 짧게 묵념을 했었다. 


체 박물관에서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햇살이 쨍쨍했다. 기념비 옆에는 웨딩 촬영하는 커플이 보였다. D도 그 옆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다른 사람 웨딩 사진을 왜 찍는지는 모르겠으나 D는 참 많은 것을 찍어대고 셀카도 자주 찍었다. 그리고 동영상까지도 특정한 포즈를 취하며 찍어 달라고 했다. 요즘 친구들은 이렇게 뭐든 찍어대는 것을 좋아했다. K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음식을 먹기 전에 항상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식사 전에 항상 기도하듯 잠시 기다려 줬어야 했다. 그들과 함께하며 요즘 젊은이들과 함께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을 특별하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비달 공원을 둘러보고 호스텔 주인이 알려준 시장에도 가 보았다. 그러나 시장은 우리가 생각한 시장과 너무나 달랐다. 규모가 작기도 했지만 물건이 많이 없었다. 시장 주변의 골목에서 집집마다 창가나 문 앞에 물건을 몇 개씩 내놓고 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집은 파스타 두 봉지, 어떤 집은 건전지 몇 개, 또 어떤 집은 양파 몇 개, 감자 몇 개 이런 식으로 내놓고 팔았다. 쿠바에 물자가 부족해서 외부에서 물건을 들여가기만 하면 몇 배로 팔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시장이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지 몰랐다. 약간의 문화 충격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할 것이 없어서 숙소에 가서 쉬기로 했다. 숙소의 옥상은 참 좋은 전망을 갖고 있어서 맥주를 마시며 쉬기에 딱 좋았다. 나는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좀 보았다. 그 사이 D는 낮잠을 자겠다고 방에 들어갔다. 그는 낮잠을 꽤 길게 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야행성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도 그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여서 나는 산책을 하고 저녁도 먹을 겸 외출 준비를 하고 나섰다. 


나갈 채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오는 나를 보며 주인은 왜 혼자 나가냐고 물었다. 

"저 친구는 낮잠을 아주 오래 자는 친구예요. 만약 일어나서 나오면 내가 비달 공원에 있을 거라고 말해 주세요." 라며 나는 주인에게 부탁했다. 

"너의 친구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잖아. 여기 쪽지를 남겨놔. 내가 전해줄게." 주인이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한국어로 '7시쯤에 비달 공원에서 만나자.'라고 적어서 종이를 내려놓자 주인의 딸이 냉큼 집어가며 자기가 전해 주겠다고 들고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말괄량이 삐삐 같은 명랑한 아이였다. 


아이는 다시 얼굴을 삐죽 내밀고 수줍은 듯이 종이에 뭐라고 썼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에겐 아직 동양인은 낯선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가까이 오라고 해서 종이에 적힌 글자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한국어로 읽어주고 스페인어로 뜻을 알려주었다. 아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때 나의 직업병이 발동해서 이 어린 친구에게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쪽지에 적힌 7을 읽을 수 있게 '일곱! 일곱!'을 반복하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따라 하라고 했더니 셋도 세기 전에 도망가 버렸다. 아이 덕분에 주인과 한참을 웃었다. 주인도 한국어는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히 그들에게 선입견만 남겨 주었나 싶어 후회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저녁에 돌아왔을 때 아이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한국어로 인사하는 것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주 쉽게 '안녕'만 알려주었다. 비록 그 아이가 나중에 그 단어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한국어가 어렵지 않다는, 한국어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산타클라라의 오후의 모습은 아주 따뜻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외출하는 것인지, 약속이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비달 공원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비달 공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하게 쉬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해 질 녘의 오후를 즐겼다. 사람들도 그렇고, 산타클라라는 소박하지만 깨끗한 도시로 보였다. 그리고 약간의 품위가 느껴졌다. 


나는 목적 없이 좀 더 걸었다. 걷다 보니 기찻길도 나왔고 어느새 장갑 열차 박물관에 도착했다. 여기도 체를 비롯한 혁명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시된 기차 박물관이었다. 기차 안에는 체와 그의 동료들의 사진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열차 박물관보다 그 앞 기프트샵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 덕분에 여행객들이 들르는 도시 중에 하나이다. 사실 체 게바라에 관심이 없는 여행객들은 산타클라라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그 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래도 내겐 의미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곳곳에 새겨진 체 게바라를 기리기 위한 그림들과 문구들이 인상 깊었고,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자유, 혁명, 승리'이런 단어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안겨준 이들을 지금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삼일 정도 여기서 현지인처럼 동네나 거닐며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리퍼를 끌면서 여유롭게 동네를 다니는 나를 상상하며 비달 공원으로 향했다. 어느덧 7시가 다 되었다. 혹시나 D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올지 모르니까 조금 더 기다렸다. 공원에서 사람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두워져도 사람들이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원 앞에는 극장처럼 생긴 곳이 있었는데 1층에 작은 홀이 있었다. 그곳에서 색소폰 연주곡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넣고 안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긴 의자에 앉아서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를 본 어떤 아저씨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순간 나는 또 바보처럼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쳐 나오고 말았다. 나와서 바로 후회했다. 그냥 살며시 들어가서 긴 의자의 맨 끝에 앉아서 같이 즐겨도 좋았을 것을... 


공원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아도 D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녁 인지도 모르고 계속 자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 혼자 저녁 식사를 하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나을것 같아서,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후라이드와 맥주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D는 속소에 없었다. 주인은 그가 30분 전쯤에 나갔다고 했다. 8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지만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역시 쿠바에서는 어디서든 약속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었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D가 숙소로 돌아왔다. 


"와! 누나! 비달 공원에 사람들 봤어요? 오! 치킨 맛있네요? 어디서 샀어요? 와! 맥주도! 감사해요!"


D가 오자마자 2층이 떠들썩했다. 손님은 우리 둘 밖에 없는데 대여섯 명 정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떠들었다. 참 말이 많은 친구라는 것을 아침에 버스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잘 때 빼고는 항상 뭔가를 떠드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산타클라라의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말 많은 친구와의 인연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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