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디든 마찬가지이다. 산타클라라의 아침은 특히나 아쉬움을 주었다. 어제와 달리 좋은 날씨도 한 몫했지만 아침에 옥상에서 따각거리며 지나가는 마차 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로 일광욕을 하니 더 부러울 것이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 평화로운 동네를 떠나 트리니다드로 가야 한다. 이미 버스표를 예매해 뒀으니 짐 싸서 움직여야 했다. 그나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주인이 준비해 준 아침을 먹고도 여유롭게 나올 수 있었다. D도 오늘 나와 함께 트리니다드로 갈 거라고 짐을 쌌다. 그에겐 산타클라라가 조금 따분하다고 했다. 하루로 족하다고... 버스는 10시 반에 출발했고 트리니다드까지는 3시간이 걸렸다.
트리니다드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그 번잡스러움에 놀랐다. 택시며 툭툭이며 호스텔의 호객꾼들이 한걸음 걸을 때마다 따라붙어서 귀찮게 했다. 우리는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나와서 곧바로 버스에서 약속한 곳으로 향했다. 트리니다드에서도 한국인에게 유명한 숙소가 있었는데 바로 '차메로'아저씨네였다. 거기도 호스텔이라기보다는 민박집에 가까웠는데, 이미 방들은 모두 만실이었다. 차메로 아저씨는 우리에게 옆 집을 소개해 주었다. 옆집도 민박집이었고 앞집도 민박집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집이 민박을 운영했는데, 보통 차메로네 아저씨 집에 방이 없을 때 옆집, 앞집으로 손님을 보내주는 식이었다.
옆집의 숙소도 나쁘지 않았다. 넓은 거실에 욕실이 딸린 방들이 있었다. 옥상도 있었고 아침까지 포함된 가격이 방 하나에 20 쿡이었다. 마찬가지로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다. 1인에 10 쿡, 그러나 방 하나를 혼자 쓰려면 20 쿡을 내야 했다. D와 나는 또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작은 침대를 쓰고 그에게 큰 침대를 양보했다. 어제는 그가 나에게 큰 침대를 양보했기에 덩치도 큰 그에게 이번엔 내가 양보했다.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먹는 것에 진심인 듯한 D는 트리니다드에서 꼭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며 Oshun Yemaya (한국인에게 오춘식당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갔다. 오춘식당은 빠에야와 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우린 둘 다 빠에야를 먹었다.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트리니다드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모두 맛있었던 것 같다. 저녁은 그 유명한 차메로 아저씨네의 랍스터 구이를 먹을 예정이었다. 이것도 낮에 미리 신청해야 해서 우리는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차메로 아저씨네로 가서 저녁을 신청했다. (차메로 아저씨네는 저녁에만 여행객들을 위한 식당이 되는데 낮에 예약을 필수로 해야 한다.)
차메로 아저씨는 트리니다드에서 아주 유명인이었다. 특히 한국 여행객들에게는. 그리고 그의 민박집에도 한국인들의 '정보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의 방명록에 가깝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아저씨에 대한 칭찬이었다. 정보북을 훑어보고 있는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언니!!!"
고개를 들어보니 K가 문 밖의 빛을 가르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럴 수도 있다니! 쿠바에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만날 수 있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기가 막힌 우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연은 쿠바에서 가끔 일어났다.) 만나기로 약속을 했을 때는 그렇게 어긋나기만 하더니 뜻밖의 곳에서 이렇게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K는 오늘 아침에 바라데로에서 출발해서 왔다고 했다. 내가 떠난 후에 그녀들은 좀 더 싼 호스텔로 옮겨서 하루 더 바라데로에 있었다고 했다. Y는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더 머물게 되었고 그래서 K 혼자 트리니다드로 왔는데 방금 짐을 방에 던져놓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폭풍 수다를 떨며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헤어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랍다며 한참을 웃었다.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고 K는 저녁을 예약하고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며 뭘 좀 먹기 위해 다시 나갔다.
차메로 아저씨네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잠시 앉아 있었는데도 왔다가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대부분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인도 있었다. D와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일본인 여자 한 명이 들어오더니 내일 같이 말 타러 갈 동행을 찾는다고 했다. D와 나는 내일 할 승마 트레킹 투어를 찾아볼 예정이었는데 우리는 잘 됐다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괜찮은 가격의 승마 투어를 찾았는데 일행이 있어야 더 싸게 탈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찾은 승마 투어는 점심 미포함 13 쿡이었다. 조금 전 정보북에서 본 것과 비교하면(보통 16~20 쿡) 완전 싼 가격이기에 우리 셋은 주인과 가격 흥정을 마치고 바로 내일 함께 승마 트레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혼자 산책을 좀 하고 싶어서 카메라만 들고 광장을 향해 걸었다. 트리니다드의 골목은 그리 깨끗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멋이 있었다. 빈티지라는 단어가 생각나게 하는 골목들이 이어졌다. 벗겨진 페인트와 깨진 벽돌, 포장되지 않은 길들이 멋스럽게 느껴졌다. 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정답게 느껴졌다. 어릴 적 우리 집 앞에서 놀던 생각이 났으나 곧 이젠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라는 생각도 잇달았다.
트리니다드는 쿠바에서도 가장 쿠바를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1600년대에 스페인군에 의해서 지어진 트리니다드는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고, 근현대에는 사탕수수 사업의 호황으로 부를 누린 부호들이 많은 도시라고 했다. 그러한 역사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어서 골목에서도 , 아이들에게도, 그들의 집에도,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쿠바만의 그런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묻어 있었다.
광장으로 가는 길은 고전적인 쿠바 같은 인상을 주는 산책하기 좋은 골목들이 이어졌고 구경하면서 걸으니 마요르 광장까지 멀지도 않았다. 광장 근처에는 노점상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이나 수공예품 등을 팔았다. 나는 내일 승마 트레킹을 생각해서 둥근 챙모자를 하나 샀다. (사실 파나마에서 사고 싶었던 모자였는데 턱없이 비싸서 못 사고 이곳에서 파나마모자와 비슷한 챙모자를 5 쿡에 샀다. 그 모자를 여행하는 동안 충분히 잘 쓰고 다녔다.)
광장에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닫아 놓았다. 아마 예배 시간에만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성당 옆의 돌계단에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이파이존이었다. 성당 뒤를 돌아 다시 한 바퀴를 돌고 어쩌다 보니 또 다른 성당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거긴 1 쿡을 내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지갑을 들고 오지 않았고 주머니에 딱 5 쿡만 넣고 나왔는데, 모자를 사고는 빈털터리였다. 꽤 유명한 성당 같아서 들어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나는 주변을 서성이다가 매표하는 아주머니에게 들어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아주머니가 아주 쿨하게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놀라서 감사 인사를 하고 냉큼 발을 들여놓는 내게 그녀가 덧붙였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됐으니까 빨리 돌아봐야 할 거예요."
나는 상관없다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사람들이 올라가는 쪽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이유는 종탑에서 트리니다드 전망을 보기 위해서였다. 멀리서 본 골목들도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바람에 흔들리는 이불 빨래들도 모두 정겨워 보였다. 해가 지는 시간이 다 되어서 마을의 색감은 더 예뻐 보였다. 종탑에서 마을 전경을 보고 내려오다가 우연히 해넘이를 보게 되었다. 낮은 집들이 줄지어 이어진 끝에 아득한 들판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되어서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설사 사진을 찍었다 해도 카메라에 이 모든 것을 다 담지는 못 했을 것이다.
1층으로 내려오니 박물관이 나왔다. 역사박물관인지 쿠바 혁명에 대한 인물들과 무기들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라는 인물에 대한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역시 쿠바 혁명은 체를 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쿠바 혁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체의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관리인이 이제 그만 나가라고 했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골목에 주황색 불빛들이 드문드문 밝아졌다. 돌아오는 길에 골목을 조금 헤매다가 저녁시간에 조금 늦었다. 차메로 아저씨네에 들어서니 벌써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식탁에는 사람들이 둥그러니 앉아 있었는데 모두 한국 사람인 듯했다. 그중에 반가운 얼굴이 또 보였다. 하바나에서 만났던 L이 있었다. 하바나에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동행들과 함께 맥주도 한 잔 했던 인연이라 안면이 있어서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Y와 동행하던 그녀는 바라데로는 건너뛰고 혼자 산타클라라와 또 다른 도시를 거쳐 어제 트리니다드에 도착했다고 했다. 신기한 건 의도하지 않았는데 K와 룸메이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K와 D도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내 자리까지 맡아놓고 있었다. 큰 식탁에 둘러앉은 8명의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고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사실 나는 여행하면서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편은 아니지만 또 굳이 한국인과 동행하려 애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쿠바에서는 한국인에게 유명한 호스텔을 찾아가다 보니까 한국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한국인들과 그것도 20대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동행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차메로 아저씨네의 식사는 훌륭했다. 바닷가재(랑고스타)가 주요리였는데 수프와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바닷가재 튀김, 소금구이, 양념구이가 인원수에 맞게 차려졌다. 특히 주인아저씨가 무한 제공하는 '칸차라차'라는 칵테일과 궁합이 잘 맞았다. 우리는 쿠바를 외치며 한 잔, 트리니다드를 외치며 한 잔, 차메로를 외치며 또 한 잔 마시고, 나중에 칸차라차만 외쳐댔다. 차메로 아저씨는 그날 칸차라차를 만들어 나르느라 얼마나 분주했던지 나중에 보니 티셔츠가 땀에 젖을 정도였다. 공짜 술이라고 너무 마셔대서 나중에는 미안해져서 우린 식사비를 지불하고도 얼마간의 팁을 걷어서 아저씨에게 주었더니 엄청 좋아했다.
알코올로 돈독해진 우리는 약간 취기가 있긴 했지만 마요르 광장에서 밤에만 연다는 '까사 델 라 뮤지카' 공연장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밤에 술을 마시고 골목길을 걸어 다녀 본 지가 언제였던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즐기는 방탕함이어서 기분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취하지 않고 딱 기분 좋은 상태에서 쿠바의 밤공기를 마시며 울퉁불퉁한 트리니다드의 골목길을 동행들과 어울려 걸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신나는 자유였다.
밤에 마요르 광장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광장 전체가 큰 음악카페가 되어 있었다. 한쪽에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술과 음료도 팔았다.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가수가 쿠바스러운 노래를 불렀다. 옹기종기 앉아서 즉흥 연주곡을 들으며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무대 앞에서 살사를 추는 커플도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을자리를 찾아서 앉아 모히또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그날의 밤공기와 쿠바스러운 분위기는 내게 깊이 각인되어서 쿠바 여행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장면 중에 하나가 되었다.
"누나! 이게 바로 쿠바스러운 거예요!"
빵모자를 쓰고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J가 음악에 리듬을 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식사 중에도 걸어가면서도 줄곧 '쿠바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딱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우리는 광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면서 이게 바로 쿠바스러운 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흥겨움과 자연스러움, 콧대 높은 자긍심이 있으면서도 애잔함이 느껴지는, 고전과 전통이 잘 보존된, 그러면서도 현대와 아날로그가 잘 어우러진, 어디를 찍든 빈티지 감성 사진이 되는, 아주 오래된 자동차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오래된 가치가 빛나는 그런 모든 것이 쿠바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광장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사람들을 보며 놀았다. 그리고 또 다른 광장도 가보고 골목도 걸어 다니며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밤거리를 활보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D와 J는 유명한 동굴 클럽으로 갔고, 우리는 광장에서 좀 더 놀다가 숙소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이렇게 남미에서 늦은 밤까지 마음 편하게 밖에서 놀아 본 것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은 아마도 쿠바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쿠바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