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추석 풍경
홍콩에서는 추석을 중추절(中秋節)이라고 부른다. 총 3일을 쉬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하루만 쉬고, 그것도 추석 당일이 아닌 다음날에 쉰다. 추석 당일에 대부분의 회사는 직원들이 평소 퇴근시간보다 3-4시간 정도 빨리 퇴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홍콩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가족 중심 문화인 데다가,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왕래가 쉬워 가족 및 친지들끼리 자주 모인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족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편이며, 주말에도 시간이 되는 사람끼리 모여 마작을 즐기거나 함께 식사를 한다. 집에 모인 가족들은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우리는 추석 전날 밤, 홍콩에서 처음 맞는 추석을 기념하기 위해 신계 지역에 있는 사틴(沙田) 공원에 갔다. 사틴 공원 앞에는 이 지역을 동서로 나누는 쉑문 강이 흐르고 있는데, 보통 사람이 많이 없어 홍콩답지 않게 한적하고 운치 있는 다리도 있어서 산책 장소로 좋다. 추석 전날이라 그런지 사틴 공원과 쉑문 강은 수많은 전등과 중국식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명절이 되면 사틴 공원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추석엔 그 전 날부터 사람이 많아. 그런데 오늘은 사람이 너무 없는 것 같아." 사틴 공원에 들어서며 비비안이 말을 걸었다.
"그래? 사람이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글쎄, 확실하진 않지만 요즘 홍콩이 시위 때문에 어수선하잖아. 사람들이 밖에 나오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것 같아. 아마 내일은 오늘보다는 사람이 많을 거야."
송환법 문제로 홍콩이 몇 달째 시끄럽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시위가 있는 주말에는 애드미럴티, 몽콕, 프린스 애드워드 등 사람이 많이 오가는 큰 역들은 시위대와 경찰의 대립으로 시설물이 망가져 폐쇄되기도 하고 거리가 막혀 버스 운행이 중단되기도 한다. 중심가와 떨어져 있는 사틴 지역은 가끔 큰 시위가 있긴 해도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밤하늘엔 보름달 앞으로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조용한 사틴 공원을 거닐었다. 작년에 우리는 서울에서 함께 추석을 보냈다. 내가 연휴 동안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 없어 유령도시 같았던 서울에서 추석 연휴를 보냈다. 비비안은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홍콩과 한국의 추석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생활하며 쉽게 체감할 수 있었던 차이점 세 가지가 있었는데, 이를 독자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 등(燈籠)
홍콩 사람들은 추석에 등을 밝힌다. 이 등을 광둥어로는 등롱(燈籠)이라고 한다. 추석이 다가오면 각양각색의 등롱이 거리를 장식하며, 아파트 로비나 커뮤니티 센터, 쇼핑몰, 공원, 유적지 등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는 형형색색의 등롱으로 장식된다. 붉은색이 많지만 노란색, 초록색, 주황색 등롱도 있다. 보통은 원기둥 형태지만, 요즘엔 만화 캐릭터로 만든 퓨전 등롱도 있으며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특이한 건 장식용 등롱 뿐만 아니라 휴대용 개인 등롱도 있다는 점이다. 개인 등롱을 밝혀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중추절 대표 놀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개인 등롱은 길거리에 걸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통형이 많으며 평소에는 납작하게 접어 보관하거나 휴대할 수 있다. 피면 원통 모양으로 길게 늘어나고 접으면 납작해지는 게 꼭 미술용 물통과 닮았다. 등롱 안쪽 바닥 한가운데에는 양초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고정장치가 있어, 양초를 수직으로 세울 수 있다. 양초에 불을 붙이면 어두웠던 등롱 안쪽이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요즘은 양초뿐만 아니라 조그만 LED 등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전통식으로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양초를 설치하여 내부를 밝혔다. 등 위쪽에는 막대기가 연결되어 있어 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 된다.
#2. 월병
홍콩의 대표 추석 음식은 월병이다. 광둥어 발음은 윳뱅(月餅)이다. 추석이 다가오면 친구들, 친지들, 직장 동료들은 서로 월병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전한다. 전통식 월병은 밀가루로 만든 빵 안에 연꽃 씨로 만든 앙금을 가득 채워 넣는다. 이 앙금은 팥앙금보다 밀도가 높아 가루를 뭉친 느낌보다는 하나의 고체덩어리의 느낌이며, 굉장히 쫀득하며 달콤하다. 연꽃 씨 앙금 안에는 함단(咸蛋)이라고 부르는 짠 달걀 노른자 두 개를 넣는다. 달걀노른자는 동그란 달을 상징하며 가족, 친구들 사이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함단은 샛노란색이며, 소금에 절여서 매우 짜다. 씹으면 딱딱하고 건조한 달걀 노른자가 작은 입자의 가루로 부서진다. 홍콩 사람들은 함단을 월병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에도 많이 넣어 먹는데, 대표적인 음식은 돼지고기 찜으로 다진 돼지고기에 함단을 올려 쪄먹는다.
월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반란세력이 들키지 않고 소통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월병 안에 편지를 넣어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원래 월병 안에는 함단이 없었는데, 원나라 시대가 이후 사람들이 넣어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통식 월병은 맛은 있으나, 칼로리가 상당히 높고 약간은 느끼하며 무거운 느낌이 있다. 따라서 요즘에는 월병을 현대식으로 응용하여 연꽃씨 앙금, 달걀노른자를 빼고 팥앙금, 커스터드, 크림 등을 넣은 퓨전 월병도 많다. 특히 퓨전 월병 중 하나인 아이스 월병이 인기가 많은데, 피를 빵 대신 쫄깃한 찹쌀떡으로 바꾸고, 그 안을 초콜릿, 바나나, 망고, 두리안 크림 등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이 월병은 가볍고 디저트 같아서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월병은 홍콩에서 아주 대중적인 음식이며, 특히 추석 때 스스로 구매하는 것이 아닌,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때문에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사들은 월병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긴 월병을 만들어 사업 파트너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홍콩 현지 회사뿐만 아니라, 홍콩에 지사를 두고 있는 다른 나라 회사도 월병을 만들어 나누어주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살바토레 페레가모나 구찌 같은 패션 회사에서 자신들의 로고를 넣은 월병을 나누어 주는 게 기억에 남았다.
#3. 밤샘 마작
공휴일 전날에 홍콩 사람들은 밤샘 마작을 하며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추석도 예외는 아니다. 추석 다음날에 쉬기 때문에 추석 당일날 밤부터 마작을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이 밝을 때까지 마작을 친다. 보통 마작을 즐길 땐 오후 3시 정도에 시작하여 4라운드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뒤 오후 8시에 4라운드를 더해 총 8라운드를 하고 끝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밤샘 마작을 할 때는 무려 16라운드를 한다. 설 전날에 밤샘 마작을 즐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추석 전날에도 밤샘 마작을 즐긴다. 두뇌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상당하여 마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밤샘 마작을 자주 즐기지는 않는다고 하며, 일 년에 한두 번, 추석이나 설날 같은 특별한 날에 밤샘 마작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사틴 공원 산책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이동한 뒤, 생오나라는 홍콩 프랜차이즈 빵집에 방문하여 아이스 월병을 먹어보았다. 나는 초콜릿 맛을, 비비안은 망고맛을 골랐다. 확실히 전통 월병보다 가벼우며 디저트로 먹기 좋았다.
"한국에서는 추석 때 뭐 하지?" 비비안이 월병을 먹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보통 친척들 만나고, 음식은 송편 빚어서 먹지." 내가 대답했다.
"아 맞아, 나도 작년에 통인시장에서 송편 먹어봤어. 지금 생각났네." 비비안이 말했다.
"그치. 우리 같이 먹었었잖아. 어땠어?"
"음...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는데 괜찮았어."
"내가 다음에 한국에 가게 되면 더 맛있는 송편을 맛보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