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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Nov 16. 2023

당신의 삶이 무참히 깨어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아픔을 수용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탄생시키는'킨츠기 예술'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때로 삶이란 불행하기는 너무도 쉬운 반면 행복하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불행의 최전선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정신과 의사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행복을 쌓아올리기 위한 조건은 여러모로 까다로운 데 반해, 우리를 불행하게 할 만한 요소들은 마치 지뢰밭처럼  삶 곳곳에 숨어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 사랑을 아는 부모를 만나 따돌림의 아픔 없이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사회인으로 거듭나, 평균 이상의 임금을 받으며 노후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세간의 인식에 따르면 그 정도는 되어야 겨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이 완성된다. 


반대로 살아가며 믿고 있던 삶이 완전히 깨어지는 경험, 인생의 근원적인 토대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기는 너무도 쉽다. 부모의 학대, 육체적이나 성적인 폭력, 불의의 사고 또는 질병, 그로 인한 신체의 장애, 전세 사기, 투자 실패, 직장 내 괴롭힘, 가정불화, 노후 준비의 어려움, 자식과의 관계 단절...  누구에게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어느 하나도 가벼운 것 없이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한 상황들을 목도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 이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스스로와 삶에 대한 인식의 붕괴다. 그동안 믿고 있던 인생의 공식이 완전히 어긋나, 마치 나 자신과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패닉이자 아노미다.


삶을 하나의 유리잔에 비유하자면, 그 느낌은 마치 완전히 깨어져버려 어떻게 해도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란 두려움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스스로가 애초에 태어날 때 부터 온전한 적이 없이 깨어진 그릇이었다는 막막함이기도 하다. 아무리 고뇌하더라도 결코 그 깨진 조각들을 맞추어 다시 안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란 절망이 우리를 압도한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의 그러한 순간과 감정들을 마주할 때 마다 떠오르는, 수용전념치료에서 삶을 표현하는 비유가 있다. 깨어진 잔 금실 공예, 킨츠기 예술의 이야기다. 




'킨'은 일본어로 '금',  '츠기'는 '잇다' 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한 장군이 진귀한 찻잔을 선물 받았다. 평소 예술에 조예가 깊던 그는 이를 매우 아꼈으나 실수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당대에 기술력으로는 제일이었던 중국에 보내 이를 수리하려 하였으나, 중국의 장인들은 단지 조각을 균열대로 이어붙이고 금속으로 고정했을 뿐이었다. 


실망한 그는 이번에는 깨진 도기를 전문으로 수선하는 일본의 장인에게 이를 맡겼다. 그 장인은 단순히 '원래대로 복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신, 그 균열도 온전히 포용할 수 있는 금실의 흐름으로 잔을 이었다. 이윽고 탄생한 잔은 단순히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품은 채로 다시 태어났다.






이 잔 하나에 수용 전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떻게 우리가 삶의 상처와 고됨을 이해하고 또 수용할 지, 그리하여 불완전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다.




타고난 외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무난하여 관계에서 거절의 상처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 물려받아 온 사업, 부동산, 병원 같은 것들이 있어서 돈 걱정 한 번 안해본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마음 먹은 일들이 모두 승승장구하여 실패란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살다보면 가끔 만나게 된다.


일생 동안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이 마치 온실 속의 화초 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그러한 이들을 보면 어쩐지 갓 탄생하여 균열이 하나도 없는 아기 도자기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온전함이 아름답다기보다는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다. 그들의 태평함과 해맑음이 부러울 뿐, 특별한 아름다움이나 깊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좀 더 일반적인 인생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이를테면 특별히 물려줄 것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한, 그러나 빠듯한 일생을 보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이들의 이야기. 또는 모종의 이유로 그런 보금자리가 존재하지 못했거나, 차라리 보호자가 없는 것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는 학대의 아픔 속에서 성장한 이들의 이야기.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쳐 입시나 구직 활동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이들 보다는 그 하나 하나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 것처럼 절박한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만 먹으면 대인관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들 보다는 서로 오해하고, 질시하고,  노심초사하며,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조금 더 흔할 것이다.


특출난 운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네 인생은 마냥 합리적이거나, 합당한 쪽으로, 도덕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도덕과 이성을 이야기하고,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강조하는 것은, 실은 삶이 그렇게 순리대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삶은 불공평하고,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갈등과 억울함, 오해의 연속이다. 




애초에 온전하다, 완벽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도달하기 쉬운 삶, 얻기 쉬운 것들을 굳이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여 그들이 반드시 당신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것도 당연한 삶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어렵기 때문에 간절히 바라는 것이므로, 원리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기 힘들다. 예측할 수 없는 불행한 우연이 일어나는 것은 덤이다. 마치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신이라는 삶의 그릇은 수없이, 무참히 깨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 아픔을 통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또 재구축된다. 겉으로는 한 점 상처나 그늘이 없는 것 같이만 느껴지는 이들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그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음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일상적인 파멸과, 이를 통해 깊어진 통찰이야 말로 특별하고 또 아름답다. 그가 그토록 깊고 진중하면서도 따뜻한 통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은 그 아픔의 조각들을 메운 금실의 무늬 덕분이다. 


이렇듯 삶의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깨어지는 아픔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균열을 나름의 금실로 하나하나 다독이며 더욱 의미있고 아름다운 삶을 엮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그러한 비유를 기억하며 나는  진료실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그러므로 불행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는 결론을 거부한다. 그동안의 깨어지는 과정이 아프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난일이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깨어진 컵의 모양이 어떠한지. 얼마나 치명적인지, 왜 이것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힘들지에 골몰하는 대신 아직은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는,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싶을 뿐이다.


'미래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는 답은 언제나, 어느 순간에서나 정답이 된다. 파괴적으로 깨어진 과거가 있고, 그로 인해 지금의 마음이 고통스러울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든 미래는 알 수 없고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 아픔이 '앞으로도 그렇게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나는 나를 찾는 이들과 금실을 함께 잣을 것 이고, 약의 도움을 받아서든 면담을 통해서든 그 실을 삐뚤 빼뚤 붙여나가며, 또 깨어지더라도 언제고 다시 붙여나가는 과정을 응원할 것이다. 좌절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에 힘을 보태는 것이 나의 업이다.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만의 '킨츠기' 를 함께 쌓아갈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균열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될 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온전히 지금으로서의 나, 살아온 모든 기억도 아픔도 아우르는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지에 대한 이야기다. 한 번 뿐인 삶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지, 어떤 모양의 나만의 아름다움, '금실 잔'을 만들어 가고 싶은지. 당연히 나에게는 당신의 '킨츠기' 를 설계하거나 강요할 능력도, 권리도 없다. 단지 오늘만큼의 조각은 어떻게 이어가 볼지, 어떤 오늘의 순간을 금실로 삼을 수 있을 지를 함께 고민할 뿐이다.




당신의 삶은 얼마나 무참히 깨어져 있는 지. 혹시 당신은 깨어지기 전의 평온만을 그리워 한 채, 흩어져버린 잔의 조각을 붙들고 슬퍼하고만 있진 않았는지. 무엇보다도 나는 먼저 그 날카로움에 베인 손을 위로하고 싶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어울리는 금실을 함께 찾아가고 싶다. 원래 모습대로 붙여가고 회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부터의 삶에서, 아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싶다.


'깨지지 않은 잔과 같은 삶' '한 점 상처 없는 편안한 마음' 이란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었다. 모든 삶은 깨어진다. 다만 깨진 유리조각을 보며 더럽고 위험하다 손가락질 할 때에도 누군가는 금실로 엮어질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당신의 절망이 조각의 잔해들로 치워질 지, 다른 어느 누구도 구상할 수 없는 당신만의 아름다운 킨츠기로 피어날 지 역시 지금, 여기, 그리고 앞으로의 당신에게 달렸다.


그렇게 다시 당신이 당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떠올리고, 그런 당신을 늘 기다려줬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미루어 왔던 일들을 비로소 다시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익숙하거나 자연스럽진 않겠지만, 지금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행복을 꾸려가고 있을 미래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그 상처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아직은 온전히 그릴 수는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매만져가는 과정이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아름다울 남은 삶'을 위한 지금 이 순간의 금실을 잣고 또 엮어가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라본다. 






P.S.


"키로쿠는 깨진 도자기를 수선하는 기술의 대가였으며, 물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불완전함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키로쿠는 큰 경의를 표하며 부서진 찻그릇을 조심스럽게 다시 엮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쇠로 이를 고정하는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땅의 기운이 담긴 물질인 금칠을 섞어서 갈라진 부분을 메우고 부서진 부분을 고치는 데 사용했습니다. 찻잔이 다시 한 번 온전해지자 쇼군은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한때 부서졌던 물체는 이제 그 역사와 회복력을 입증하는 금실로 빛났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습니다. 그리하여 킨츠기 미술이 탄생했습니다. "결합하다"를 의미하는 "츠기"와 "금"을 의미하는 "킨"를 혼합한 이름은 불완전함의 아름다움과 삶의 시련과 고난을 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SCOTT SEIVWRIGHT, From Broken to Beautiful: Embracing Kintsugi’s Principles for a Resilient World 중에서)

(참고, 사진 인용: https://beingbeyondbetter.com/from-broken-to-kintsugi/)



https://blog.naver.com/dhmd0913/223179745248

https://blog.naver.com/dhmd0913/223072138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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