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K는 갈색의 가벼워 보이는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그것을 끼운 채로 서있는 K 모습이 길 건너편에서 보이자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K는 앉아서 보는 것보다 서 있을 때가 훨씬 몸이 날렵해 보였다. 사각형 모양의 안경테에, 미색의 남방을 입고, 비슷한 빛깔의 면바지를 입고서 신발은 스니커즈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길을 다 건너가기도 전에 쾌활하게 물었다.
"이 겨울에 외투는 어디에 두고 오신 거예요?"
"저는 추위를 별로 안 타요."
"그래도 보고 있는 사람이 추워지겠어요."
나는 K에 비하면 에스키모인이다. 두 벌의 상의를 껴입고, 두툼한 검은색 외투를 입고, 면적이 넓고 길이가 긴 목도리를 두르고, 기모 청바지에 잿빛 색깔 부츠를 신었다. 내 목도리라도 주고 싶을 정도로 K는 정말 갖춰 입은 것이 없었다. "춥죠? 이 근처에 11;19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작은 카페인데, 들어가면 재밌어요. 그곳으로 가죠."
오늘 K가 그라폴리오를 보여준다고 나왔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대체로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였다. 그가 하는 일은 디자인을 감별하여 더 나은 디자인을 뽑아내고, 상품 마케팅 효과를 늘리는 일을 한다. 처음부터 이 일이 쉬웠던 것은 아니랬다. 아무리 디자인 회사에 포트폴리오를 가져가도 이미 자신들에게는 디자이너들이 즐비한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며 포트폴리오를 건성으로 보았다. 그는 디자인도 매너리즘이 있으며, 그렇고 그런 디자인들이 주야장천 표절당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런 복잡하고 정돈이 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은 개성을 잃지 않은 디자인과 그 다자이너의 앞 날을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소규모 디자인 회사에서 그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과장이 그의 이런 생각을 듣고 보수 없이 한 번 감별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의 디자인 감별법은 그 해 디자이너가 제출한 세 작품이 디자인 상을 받을 수 있게 했고, 그의 존재가 업계에서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다. 그는 디자인에서 자연주의와 미니멀리즘을 손꼽는다. 그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남성이라느 것을 보면 드러난다. 미니멀리즘은 그가 매우 여유있고 정확성보다 간편함을 높이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좋은 작품의 디자인에서 돈과 화려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심플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그의 감별력에 자극을 받고 트렌드가 바뀌어 갔다.
저만치만 가면 그 카페가 있다. K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K처럼 디자인에 관심이 갔던 중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그 시절 나도 신문과 잡지에 눈을 뜨면서 전면 광고, 잡지 사진에 매혹되었는데, 내가 아빠에게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러셨다. '그건 색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가만히 그 말을 되새겼다. 나는 남들이 다들 나처럼 보는 줄 알았다. 나는 색깔을 구분하고 명도와 채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이상하게 그 꿈과 멀어지게 했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상하지만, 자신이 가진 능력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 그건 무용지물이 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K의 그라폴리오는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 같았다. 펜으로 그린 듯도 했고, 연필, 만년필 등 뾰족하고 검은색을 지닌 것이었다. 어떻게 작업을 하나 보았더니, 노트북 USB 포트에 연결한 패드 위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전자펜을 쥐고 원하는 대로 힘을 가하면 노트북 화면에 스케치가 나타났다. "한 번 해보실래요?" 나는 펜을 쥐었다. 그는 살짝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대고 압력 조절을 어떻게 할지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아주 살짝 건드리는데도 그 힘이 모두 선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다가 졸라맨을 그렸다. 졸라맨이 점프하고, 졸라맨이 조깅하고, 졸라맨이 두 팔 벌리고, 졸라맨이 요가에서 개자세을 하고. 그러자 K가 웃었다.
11;19은 잡동사니가 많은 카페였다. 손님이 기웃거리니까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메모에는 나 주인장은 참 까다롭소이다... 하고 안내하고 있었다. K는 바닐라 라떼를 시키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머그잔에 주지 않아서 조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커피는 향이 좋고 맛은 깔끔했다. K는 나의 눈을 정면에서 지그시 바라보고 물었다.
"전공은 더 이상 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되었어요. 저는 지금이 더 좋아요."
K는 노트북을 내가 잘 볼 수 있게 대각선 방향으로 놓더니, 파일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람의 손을 많이 그렸다. 조금 지루했다. 나는 이쁘게 생긴 손이 좋던데, 보이는 손들은 거칠고, 투박하고, 나이 들어 보였다. 한참 보니, 드디어 조각같이 이쁜 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 나는 감탄사가 나왔다.
"이 손의 주인공들은 얼굴도 잘 생겼나요?"
"알 수 없군요. 이건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끝난 모델이거든요. 제 머릿속에 있는 손 모델."
"분명 얼굴도 잘 그리실 것 같아요."
K는 내 손을 보면서 바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주먹을 부드럽게 쥐고 있었는데, K는 내 손가락을 다르게 변형시켰다. 빵! 하고 총을 쏘는 손가락 모양으로 바꾸더니 슥슥 그렸다. 한 번 손을 보면 머리 안에 그 생김새가 그려져서 자유자재로 손가락 자세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 그린 나의 손은 정말 총이었다. 적당한 굵기의 뼈마디가 여자 손이지만 힘이 느껴졌고, 손가락 길이가 정말 저 정도인가 싶게 내 손가락 길이가 길어 보였다.
"저 이 그림 주세요. 갖고 싶어요."
K는 내 메일 주소를 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