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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Apr 04. 2021

키티 키티 키티

8장

 나는 따뜻한 정장을 꺼냈다. 조금 짧은 스커트와 커다란 단추가 달린 재킷 안에 촘촘하게 엮인 초콜릿 색깔의 니트를 입었다. 선을 보러 온 남자는 자신의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덜 부담스러웠다. 차 가까이로 가서 창문을 두들기고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둘 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 긴장감이 없었다. 남자는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며 회사 이야기를 잠깐 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은 이탈리아 음식을 하는 곳이었다. 식당 외부는 검은색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내부는 하얗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가 따뜻한 빛깔이어서 그나마 추워 보이지 않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앉아서 정면으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첫인상. 별로였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나에게 엄마는 5살 연상이라고 하셨다. 남자는 내가 실망한 것을 눈치챘다.


"왜 결혼을 아직 안 하고 계셨나요?"


 남자는 아예 긴장감도 서먹함도 잊고 질문을 했다. 나는 디 마레의 뜨끈한 국물을 스푼에 담아서 천천히 음미했다. 직선적인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생각했다.


"솔직히 바이올린을 전공한 여성분이라면, 남자들 로망 아닌가요?"

"네, 그게 오히려 저한테는 함정이었죠. 그냥 고상하고, 도도하고, 악기를 전공한 예술가이면 좋을 텐데, 저는 예술로 만족이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로 만족하면, 그야말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될 뿐 감동이 없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평론가 같군요."

"인간적인 예술이 무엇일까 생각하기 시작하자 결국 지쳐서 그만두었어요. 차라리 아마추어로 남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어요."


 식당 밖으로 나와서 나는 차를 안 타고, 나 혼자 돌아가려고 했다. 남자가 물었다.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나는 머뭇거렸다. '로맨틱 코미디? 액션? 드라마? 스릴러?'

"요새 무슨 영화 상영하는지 모르겠네요."

 남자는 차에 다가가 내가 타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이 시간에 영화를 봐요?"

남자는 말이 없다.

나도 모르게 몸이 딸려간다. 차에 올라탔다.

"저는 순영씨가 마음에 듭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끝내고 싶은 심정과 '이 남자 참 솔직하네'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남자가 브레이크 천천히 밟는다.

 

 차는 2차선 다리 위를 시원하게 뻗어나간다. 나는 시선을 오른쪽 창문 밖으로 두고 내내 말이 없었다. 남자도 말이 없다. 남자는 다리를 건너자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한다. 그곳으로 가면, 카페 거리가 있다. "커피 마시러 가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남자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 "인간적인 예술이 뭔지 좀 들어보고 싶네요."


 커피 요리사 승훈이네라는 카페는 바리스타가 블렌딩한 커피가 세 종류 있다.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나는 흐린 날을 골랐다. 남자는 맑은 날을 골랐다.

 '남은 건 '비 오는 날'이군. 이게 좋은 징조일까.'


 남자는 앉더니 슈트 상의를 벗는다. 그러자 그가 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셔츠로 비치는 남자의 상체가 탄탄하고 굴곡이 보였다.


"운동을 하시나 봐요."

"네 사이클과 수영 그리고 마라톤도 합니다."

"그럼, 철인 삼종경기에 나가셔야겠다."

"여러 차례 나갔습니다. 메달도 딴걸요."

"세 가지 중에 뭘 제일 좋아하세요?"

"처음에는 사이클이 좋았는데, 이제는 세 가지가 꼭 하나로 연결된 듯이 하나만 말하기 힘드네요."

"저는 요가를 해요."

남자가 자꾸 씽긋 웃는다.

"제가 웃겨요?"

"아까 저녁 먹을 때는 다 포기한 얼굴이더니, 밝아 보여서요."

나의 표정관리는 이렇게 엉망이다.

커피가 나왔다.

흐린 날과 맑은 날.

"커피 좋아하세요?"

"제 회사에는 커피 머신이 있어서 즐겨 마셔요."

"아... 요즘은 커피 머신이 있는 회사가 있다는 말 들어봤어요."

"예술을 하시다가 지금 하시는 일을 하니, 마음에 안 차겠어요."

"아뇨. 음악 못지않게 상담사도 소리가 중요한 직업이에요. 고객의 말소리도 귀 기울이고, 제 말소리를 갈고닦아야 해요. 악기를 연습하다 보면, 테크닉에 빠져서 정작 악기의 소리에는 무심해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처럼 전화 상담사도 내가 말하는 내용을 생각하다가 제 목소리 톤을 놓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좋은 상담을 해주지 못하게 되지요. 악기도 목소리도 결국은 어떻게 들리는지가 중요하니까요."

"제가 듣기로는 목소리가 충분히 좋은데, 그보다 더 좋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악기도 상담도 제가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면 좋은 소리를 전달하기 힘드니까요."


남자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내 말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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