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막독 세 번째 시간이다. 각자 가장 길게 발언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다들 조금씩 긴장하고 있다. 지난주에 빠졌던 나는 책방 주인에게 토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주에는 라비크와 조안나가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결론을 지었어요. 그런데, K분은 프랑스의 다리, 호텔, 바가 둘을 엮어 놓았기 때문에 시대가 아닌 공간이 빚어낸 사랑이라고 주장했죠. 오늘은 K분의 생각을 더 들어보고, 이 소설이 얼마나 전쟁의 실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눌 거예요."
K가 말을 꺼낸다. "제가 지난 시간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간보다 프랑스 파리라는 장소가 주인공과 여인을 엮어준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신을 갖고 있지만,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 그 당시 여성들이 그 피폐한 시기에 낙태를 하게 될까요? 그건 전쟁이라는 시간적 행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며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죠.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살기 위해 함께 밤을 보내고, 그건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궁핍보다 파리의 밤거리에서 도망쳐서 물리적으로 서로 원하는 것입니다. 제 얘기는 정신은 이 세상 물질을 벗어날 수 없다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인간은 물질이 주는 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죠."
난쏘공이 곧 말한다. "밤거리에서 도망치는 행위가 바로 외로움인 거잖아요. 왜 외로움과 사람의 행위를 나누어서 생각하나요?"
앨리스가 곧 말한다. "정신, 물질... 이런 것이 아니고, 사랑에 빠진 거잖아요. 세상을 자꾸 복잡하게 말로 규정짓기 때문에 일이 꼬이는 거죠. 당시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하고 싶었어요. 다 마찬가지잖아요."
반 고흐가 조용히 일어난다. 우리들은 그가 천천히 걸으며, 멤버들을 지나가더니, 다시 돌아오며 말을 꺼내는 모습에 집중한다. "정신, 물질, 외로움, 사랑, 행위... 이 모든 단어들은 우리가 독자이고 제삼자이기 때문에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가가 이 시대를 겪은 의사라는 점에서 우리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감성과 이야기로 적힌 신문기사를 대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이야기는 실제에 가깝습니다. 우리 잠시 조용히 앉아서 이 순간을 나눠볼까요."
우리는 반 고흐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서 일제히 침묵에 들어간다. 말이 아닌 공감으로. 나는 침묵 속에서 생각한다. 주인공은 전쟁을 겪은 의사이고, 그는 파리에서 전쟁, 외로움, 과거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까지 잃게 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죽음, 외로움, 사랑, 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진실이지만, 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인데, 내가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 반 고흐는 정말 주인공을 이해하면서 저렇게 눈을 감고 있는 걸까.
반 고흐가 눈을 떴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 시선이 서로 마주치고, 그들 각자가 처한 외로움을 꺼내 놓은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축축한 외로움을 꺼내서 햇빛에 말리는 일을 하기나 할까. 이렇게 막독 모임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지닌 쓸쓸함을 조금씩 엿보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나서 어떻게 기억과 감정이 바뀌었을지 궁금합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의사이고, 정말로 젊은 여성들이 산파를 찾아가서 낙태에 실패하고 자신을 찾아와서 수술을 받다가 죽고 말았죠. 그리고 자신은 바에서 술을 마시며 자신이 직접 수술한 젊은 여성을 만났을지도 몰라요. 아마 기억도 못했을 테지만, 이것이 바로 삶이라는 거죠. 그는 수술대에서는 이성과 감성을 내팽개치고 집도했겠지만, 수술대를 떠나면 몹시 외롭고 힘들어했을 겁니다.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작가 자신의 기억과 조우하는 시간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글을 쓴 거죠.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많은 독자가 자신의 소설에 감동을 받는 현상에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바나나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저는 소설가가 작품을 무조건 허구로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처럼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 소설이 탄생하죠. 소설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진실을 알리는 하나의 세계예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지금 숨 쉬는 현재처럼, 글을 통해 생생하게 태어납니다. 저는 소설이 어떤 주제를 갖고 있다고 결론짓지 말고, 우리가 현대에 살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을 언제든지 내 방에서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이 소설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바나나의 얘기를 듣고 덧붙였다.
"저는 이 소설을 중학교 시절에 친구가 권해줘서 처음으로 읽었어요. 그 시절 라비크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낭만적이고 외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파리가 어둡고 황폐하게 묘사되었다고 느끼지 못하고 그냥 읽었죠. 제 이해와 공감 능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라비크를 통해 그 시대를 볼 수 있고, 그 당시 여성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의사가 아니면 그녀들이 겪은 죽음의 문턱을 알 수 없었겠죠.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주인공이 의사인 사실이 소설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자서전처럼, 소설은 생생합니다."
80분의 시간 동안 멤버들은 모두 깊은숨을 쉬며 서로의 대답을 경청했다. 우리는 아주 진지해졌다. 각자 말하는 바가 다르면서도,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을 고전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파리, 2차 세계대전을 그 어떤 다큐멘터리도 이렇게 인간적으로 담아내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그 점에 동의했다.
침묵과 발언에 집중했던 터라 모두 목이 말랐다. 책방 주인은 시원한 음료와 따뜻한 커피를 갖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