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빠와 나 5
"괜찮아, 아빠가 다 알아서 할게"
어릴 땐 나는 안심시켰던 말.
지금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말.
오전 여덟 시쯤 조식을 먹고 방에서 늑장을 부리다 아홉 시가 넘어서 밖으로 나왔다. 웰스 부티크 호텔의 조식은 아주 기본적인 호텔 조식 메뉴 몇 가지에 잘 만든 레스토랑 음식 몇 가지를 더한 듯한 구성이었다. 화려하고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 손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 느낌. 아빠와 나 둘 다 조식을 대하는 자세가 너그러워서인지 지금까지 머문 숙소의 조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불만이 없다.
아빠는 비슷한 연배의 여느 어르신들처럼 꽃과 풀, 나무를 좋아한다. 오늘의 모닝커피 장소는 그런 면에서 아빠가 쏙 마음에 들어할 곳이다. 숲 속 정원 같은 마당을 품은 펀 포레스트 카페는 호텔에서 걸어가기에는 살짝 애매한 거리에 있지만 커피 한 잔 마시려고 30분이나 걸어갈 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말로 아빠의 기대치를 한껏 높이며 아침 산책하듯 올드시티를 가로지르며 걸었다. 길 옆에 신기한 조형물이 보이면 멈춰서 사진을 찍고 수공예품과 그림을 파는 기념품 상점에 잠깐 들어가 구경도 하면서 걸으니 카페와는 별개로 이것 또한 나름의 여행 코스 같았다.
카페 앞에 도착한 아빠와 내가 대문 안 쪽 마당에 들어서자 아예 다른 공간에 온 듯하게 공간이 바뀌었다. 울타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나무들이 결계를 친 것 마냥 카페 외부와 안쪽 마당을 단절시켜 놓은 덕에 이러한 변화가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야외 테이블 대부분은 손님들로 가득한 와중에 마당 한 귀퉁이에 비어 있는 낮고 편한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울창한 숲 속처럼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었는데 마당을 거닐고 있는 새가 여러 마리, 나뭇가지 위에는 새 둥지도 보였다.
치앙마이에 온 지도 일주일, 여기저기 카페를 많이도 다니면서 커피를 주문하고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빠짐없이 거치는 통과의례가 있다. 주문을 하고 나서 카페를 잠깐 구경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휴대폰 화면만 주시하는 아빠. 그런 아빠를 보며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하며 타박하는 아들. '뭘 할 게 있냐'며 그냥 뉴스 보는 거라는 아빠. 여기까지 와서 앞에 사람 앉혀 놓고 꼭 그래야겠냐는 아들.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는 아빠. 그러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면 전혀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카페에 와서 앉을 때마다 꼬박꼬박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나마 처음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지고 서로 나긋나긋해졌다.
나 : 오늘은 오후에, 일몰이 되게 예쁜 데가 있어. 좀 높은 데. 여기서 벗어나서 한 40킬로?
아빠 : 산에 올라가서?
나 : 차로 올라가. 거기 산 위에 높은 지대에 꽃밭도 예쁘게 만들어 놓고, 앉아서 일몰도 보기 좋게 해 놓은 데가 있어. 근데 보통은 오가는 길에 구경할 만한 데 몇 개 낑궈놔가지고 한 여덟 시간짜리 맞춰가지고 택시 대절해서 투어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거 좀, 귀찮잖아. 그래서 딱 거기만 찍고 오는 데, 거기 있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네 시간. 그중에 왕복이 두 시간이고. 그렇게 해서 1,600바트라고 하더라고.
아빠 : 그래서, 거기 간다구?
나 : 어제 내가 네이버 카페에 동행 모집하는 글 올렸어, 밤에 호텔에서. 그래서 두 명 같이 동행해. 그럼 아빠랑 나랑 인당 400(바트)밖에 안돼. 근데 그쪽은 부녀 여행객이래. 아부지랑 딸이랑.
치앙마이 올드시티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4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몬쨈에서 보는 일몰이 그렇게 좋았다는 후기를 여러 개 보고는 여행 계획을 짜면서 갈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여덟 시간을 꽉 채운 투어로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예 포기하는 건 아쉬워서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나서 까지 고민을 하다 어젯밤 급하게 도이 인타논 투어를 함께한 기사님께 연락해서 일정을 여쭤봤다. 본인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친구분을 소개해주겠다고 하시기에 소개받은 기사님께 연락해 4시간 코스로 예약을 하고 나서 치앙마이 여행자 카페에 동행 모집 글을 올렸다.
당장 다음날 오후에 다녀오는 일정이라 동행 모으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안되면 말고 식이었는데 글을 올리고 5분도 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다니는 조합 못지않게 드문 부녀 여행객이라니. 놀랍고 신기하면서 다행이었다. 짧은 시간 동행이지만 벌써부터 뭔가 동질감이 생겼다.
아빠 : 생각보다 시원해서 좋다.
나 : 치앙마이가? 지금이 건기라 그럴 걸. 습도가 낮으니까.
이런 말들이 오가다 중간에 몇 분씩 대화가 뚝 끊어지기도 한다.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도중에 불쑥 찾아오는 침묵의 시간도 잦다. 그 침묵의 시간이 어색하지 않다. 서로 가만히 앉아 몇 분이고 조용히 있다가 문득 할 말이 떠오르면 아무 때고 입을 연다.
갑자기 아빠는 커피가 쓰다고 투덜댄다. 아빠 취향에 맞추어 메뉴판에서 '허니 아메리카노'를 발견하고 주문했으니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괜스레 아빠에게 단 음식 너무 먹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다. 치앙마이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 아빠와 나의 관계에서는 내가 더한 잔소리꾼이다.
아빠는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면 늘 '후루룩' 소리를 낸다. 아빠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못마땅한 티를 팍팍 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광경이라 아빠가 뜨거운 음료를 마시면서 소리를 낼 때마다 반사적으로 엄마 생각이 난다. 솔직히 나 또한 듣기에 편하지는 않지만 엄마가 자식들 앞에서 아빠 무안 준 것이 생각나 나는 잠자코 있는 편이다.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서운했겠지. 서운한 일이야 서로 한두 가지가 아닌 건 너무 잘 알지만.
나 : 아빠, 아빠는 뭐 나한테 기억에 남게 서운한 거 없었어?
아빠 : 뭐가 있어.
나 : 사소한 거라도. 원래 사람은 서로가 다 서운해하고 그렇잖아.
아빠는 말이 없다.
나 : 없어?
다시 묻는 내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빠.
나 : (웃으면서)뻥치시네. 아빠가 아들한테 거짓말을 잘도 하시네.
나는 아직 자식이 없어서 부모가 어떨 때 자식에게 서운한 지 알지 못한다. 아빠는 나에게 언제 서운했을까. 여행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다시 골똘히 생각하다 언젠가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아들, 아빠가 아들 목소리 듣고 싶어 하는데 통 전화도 안 하고 그럴 거야?
아빠 서운한데.
카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카오 소이' 식당에 갔다. 카오 소이는 코코넛 밀크와 커리 소스가 들어간 국물에 면을 넣고 끓인 요리다. 부드러운 커리에 향신료가 더해진 맛이 나는 카오 소이는 스타일에 따라 계란으로 만든 면을 쓰거나 쌀국수 면을 넣는데 치앙마이에서 먹었던 카오 소이에는 대부분 계란면 들어가 있었다.
도로변 인도를 걷다 '카오 소이 꾼 야이' 간판을 확인하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기둥에 지붕을 얹은 개방형 식당과 그 앞에 널찍한 마당이 보였다.
나 : 아빠, 여긴 오전 열 시에 열어서 오후 두 시면 장사가 끝나.
아빠 : 무슨 식당이 그래.
나 : 네 시간만 팔아도 될 정도로 장사가 잘 되니까 그런가부지.
여행 오기 전부터 카오 소이로 꽤 유명한 식당이라는 걸 미리 알고 찾아온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지 못하고 대기하는 손님이 많다. 주문을 먼저 한 뒤 30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자리에 앉았다. 카오 소이의 사이즈와 들어가는 육종(소, 돼지, 닭)에 따라 한 그릇에 40~60바트 밖에 되지 않아 가격도 착했다.
치앙마이에 머무는 내내 뭘 먹을 때마다 아빠 눈치를 살펴왔지만 아빠가 처음 먹어보는 태국 음식을 앞에 두고 있을 때는 긴장감이 더하다. 아빠가 면으로 된 음식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카오 소이 국물이 우리 입맛에 익숙한 커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기에 기대가 없지 않았다. 이제는 아빠가 첫 술을 떴을 때의 표정만 봐도 대강 음식 맛이 맘에 드는지 영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아빠는 벌써 표정으로 '별로다'를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빠 입맛에는 향신료 맛이 조금 강했나 보다. 이제는 아빠가 음식 맛을 타박해도 너무 서운해하지 않는다.
나 : 아빠, 오늘 저녁은 맛있는 수제 햄버거 먹을 거야. 너무 심란해하지 마(웃음).
식사를 마치고, 땡볕에 걷기가 부담스러워 호텔까지 2km 되는 거리를 차로 움직였다. 투어 픽업이 예정되어 있는 오후 세 시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호텔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 조카에게 약속한 편지를 썼다. 아빠는 들어오자마자 망고를 꺼냈다.
타페 게이트 길 건너편 스타벅스 앞에서 동행할 분들과 기사님을 만났다. 밝고 부드러운 인상의 아버님과 따님은 일찌감치 도착해서 스타벅스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부자 여행객과 부녀 여행객의 만남이 서로 신기하다 못해 반갑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양쪽의 아빠들은 물론 아들과 딸까지 모두 각자의 아내와 남편을 한국에 두고 단둘이 여행을 왔다는 점까지 닮아 있었다.
기사님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분이셨지만 서로 간단한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역시나 내가 앞자리에 타고 아빠는 동행분들과 함께 뒷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분이 계시니 마음은 지난번보다 편했다.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어떻게 이런 조합으로 단둘이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여행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먹한 긴장을 풀었다.
거리로는 40km가 넘고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몬쨈 가는 길. 도이 인타논 때와는 다르게 가는 길이 훤한 대낮이라 차창 밖 풍경을 보는 맛이 있었다. 북쪽으로 쭉쭉 달려 나가던 차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2차선 도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산자락에서는 완만한 경사의 곧게 뻗은 길을 지나다 어느 정도 높이부터는 도로가 구불구불해지면서 조금 더 가파르게 변했다. 거의 다 와서는 도롯가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나무가 도로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숲 속을 달리는 느낌이 났다.
잠시 후, 산중에 널따란 평지가 나왔다. 공터에 주차된 차들이 여러 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차를 대 놓고 걸어 올라가야 하는 듯. 차에서 내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올랐다. 과일이나 티셔츠, 기념품을 파는 소박한 천막 상점들이 그렇게 길지도 않은 오르막 길에 소소한 볼거리가 되어주었다. 마지막 상점을 지났을 때, 펑퍼짐하게 너른 산마루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