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산마루에 올라 바라본 눈에 가득 찬 풍경은 광각 렌즈 할아버지가 와도 다 담아낼 수 없을 듯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나와 같은 눈높이 저편에 보이는 산등성이가 주위를 크게 둘러싼 와중에 눈 아래로는 나무들로 빽빽한 숲이 펼쳐졌다.
산마루의 다른 편에는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며 꽃밭이 넓게 가꾸어져 있었는데, 울타리를 치고 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인당 20바트 입장료를 아낄 이유는 없다. 하양, 보라, 노랑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꽃밭의 곳곳에서 사진을 찍거나 꽃을 구경하는 방문객 무리가 눈에 띄었다. 그중 몇몇이 식물 줄기를 엮어 만든 꽃바구니를 등에 메고 있길래 기사님께 물어보니 사진 찍을 때 소품으로 사용하라고 놓아둔 것이라 한다. 나도 하나를 구해다가 아빠에게 주었더니 아빠는 별로 거부하는 기색도 없이 흰색 꽃이 담긴 바구니를 등에 메고 꽃밭을 활보한다. 영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면서 웃기기도 해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 속 아빠는 정말로 꽃길만 걷고 있었다.
해 질 녘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구도로 실컷 사진을 찍어댔다. 카메라 다루는 실력이 시쳇말로 '똥 손'이지만 그럼에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몬쨈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아빠와 나는 꽃밭 중간에 세워진 몇 채의 오두막 가운데 하나에 올라앉았다. 가만히 오두막에 앉아 산바람을 맞으며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듯이 일몰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산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빠의 등을 본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 순간이 이번 여행의 절정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와 원 없이 이야기하러 온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은, 그저 말없이 함께 일몰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언제나처럼 휴대폰으로 보는 뉴스 기사에 빠졌지만.
원두막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한껏 길쭉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편 산 능선 한 뼘 위에 걸쳐 있는 해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노란 물이 번지는 동안 꽃밭도 같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풍경 위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조명이 내려앉은 장관을 내 글 따위가 제대로 표현해내길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방문객들은 저마다 일몰을 배경으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나 또한 노을을 배경으로 꽃과 나무를 찍다가 그럴듯한 곳을 발견하면 아빠 사진을 찍어주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기사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아 윌 테이크 유어 픽쳐' 하신다. 기사님 덕분에 나무 벤치에 앉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아빠와 나의 뒷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을 찍는 순간 아빠가 두 팔을 내 어깨 위에 포개어 기댔다.
해가 산을 아주 넘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사라지는 해가 신호라도 된 것인 양 우리를 포함한 방문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지고 없는 동안에도 잠깐은 밝은 기운이 남아 있었던 주변이 차에 타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어둑해지더니 픽업 장소였던 타페 게이트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 두 분은 숙소에서 짐을 찾고 공항으로 이동해 밤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다. 이분들께는 몬쨈이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던 셈이다. 이틀 후면 우리도 치앙마이를 떠난다. 오늘을 아쉬워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이곳에서의 시간을 더 소중히 보내야겠다고 일단은, 금방 흐릿해질 것을 알면서도 다짐해본다.
호텔 조식과 카오 소이 한 그릇 외에는 딱히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던 우리는 바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카오 소이가 그다지 입에 맞지 않았던 아빠에게 약속했던 대로 저녁 메뉴는 수제 버거다. '락 미 버거'라는 수제 버거 전문 레스토랑이 근처에 있어서 다리품을 얼마 들이지 않고 금방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식당 안 쪽,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골랐다. 수제 버거 가짓수가 많아 그중 이름에 식당 상호(Rock)가 들어 있는 대표 메뉴 두 가지를 주문했는데 하필이면 아빠는 그중에서 'Rocking in hell'이라는 버거를 선택했다. 리스트레토 카페에서는 '사탄 커피'를 고르더니 이번에는 '지옥(hell) 버거'라니. 밥을 먹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식사 기도를 드리는 아빠는 락 미 버거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지옥 버거를 앞에 두고 경건한 태도로 감사 기도를 올린다.
이제 막 음식을 먹기 시작하려는데, 서빙하는 분이 다시 와서는 패티의 굽기가 애초에 우리가 주문했던 미디움 레어가 아니라 웰던으로 구워졌다며 사과하고 아빠 앞에 놓인 버거를 다시 들고 돌아간 후에 새로 음식을 내 왔다.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이야기해주고 원래 주문대로 다시 조리한 음식으로 바꿔준 마음이 고마웠다. 아빠나 내 성격상 미디움레어 치고 고기가 너무 익었다는 생각이 들었어도 여긴 그런가 보다 하면서 그냥 먹고 말았을 것인 데다 서버에게 고기가 너무 익었다고 확인을 요청해도 '여긴 이 정도가 미디움레어다' 라고 되받았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게다가 난 언제 다시 올 지 모를 여행객 아닌가.
실수를 감동으로 바꾼 친절에 음식이 혀에 닿기도 전부터 맛이 좋았다. 결국 아빠는 감사 기도를 '입힌' 지옥 버거 대신 새로 온 놈을 먹게 되었지만.
아빠 : (패티)두께도 두께지만,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고기가, 고무 덩어리 같은 느낌이고 이거는 그냥 무슨 (떡갈비)반죽 한 것처럼 연하고 부드럽잖아. 이거는 육즙이 있다고 보면 거기서 나온 그거는 육즙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
하필이면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타던 날 점심으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은 아빠의 가혹한 비교가 더해진 수제 버거 시식평이다. 처음엔 태국 음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아빠가 야속할 뻔도 했는데, 그나마 피자, 버거 같은 서양 음식을 잘 드시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빠 : 이거 하나는 얼마 하지?
나 : 8천 원 정도?
아빠 : 싸네. 한국에서 이런 거 먹으려면 만 삼천 원, 만 오천 원은 줘야 할 것 같은데.
버거 메뉴 하나에 200바트를 넘나드는 가격이 이곳 음식 물가 대비 절대로 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퀄리티의 음식을 한국에서 먹을 때와 비교하면 여전히 감사한 가격이긴 하다.
그나저나 해외여행 와서 돈을 쓸 때마다 원화로 환산해서 우리나라 물가와 비교해 보는 버릇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걸까.
나 : 아빠는 공공 근로 같이 하는 칠십 대 중후반 어르신들하고 세대 차이가 나?
아빠 : 나지.
나 : 진짜? 같이 늙어가는 나이에 세대 차이가 나?
아빠 : 많이 나.
나 : 어떻게 나? 그거는 지역 차이야, 진짜 세대 차이야?
아빠 : 그… 먹는 거에서도 좀 나...
나 : 그건 아빠가 좀 젊게 먹으니까 그런 거지.
아빠 : 그러니까.
나 : 그 양반들은 자꾸 쌀밥에 국물 먹재?
아빠 : 그럼.
아빠는 정년 퇴임 후 1톤 트럭으로 개인 화물을 하다 2년 전 하던 일을 정리했다. 갈수록 벌이는 시원찮아지는데 누적된 사고 건 수 때문에 보험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난 영향이 가장 크고, 운전을 업으로 하는 아빠를 마냥 안심하고 지켜볼 수 없었던 가족들의 염려도 여기에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아직은 계속 돈을 벌어야 했던 아빠는 지난해부터 공공 근로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구에서 운영하는 공원 시설을 관리하는 일이라 예초기를 돌리거나 나무의 가지를 치는 등 주로 밖에서 하는 작업이 많다. 언젠가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짓는 것이 꿈인 아빠는 예순여덟이 되도록 농사꾼이 되지 못한 채 도시 한복판에서 낫질 에이스 노릇을 한다.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9개월 동안만 계약직으로 운영하는 일자리라 아빠는 한국에 돌아가면 2020년 공공 근로에 다시 지원해서 면접을 봐야 한다. 원래 2월 중으로 계획했던 치앙마이 여행을 1월로 당긴 것은 언제 잡힐지 모르는 아빠의 공공 근로 면접 일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즘 아빠는 올 한 해 같은 곳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모두 많다.
나 : 구에서 몇 명 뽑는다고 올해?
아빠 : OO명이니까 통상... 우리가 작년에 서른 세 명이었거든. 여자들 다섯 명 해서 서른여덟이란 말야. 근데 이제 우리가 생각하기를 작년보다 인원을 적게 뽑을 거다 하는 게 왜냐면 아빠가 작년에 거기 대학교 주변으로 해서 작업을 싹 했는데 처음 왔을 때 전혀 공원 관리 안 했던 데를 관리해서 공원처럼 만들어놨으니까 올해는 사람을 적게 뽑을 것이다.
나 : 아니지. 최소한 사람을 똑같이 뽑고 일이 편해지것지. 왜냐면 예산은, 그 예산은 안 줄었을 거니까.
일을 잘했으니 올해도 뽑아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아빠는 불안해한다. 그런 아빠에게 이제는 그만 쉬시라는 말은 못 하고 계속 일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심어주는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이 상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아빠 : 거기가 나무를 심어도 죽고 그런 게 많고 그늘이 없어 가지고 여름에, 8월 달에 제일 더울 때 그늘이 없어서 우리가 쉴 때 어떻게 했는지 아냐. 길에 가로등 있는 데, 그 가로등 밑에서 쉬었다. 그런데 그쪽으로 공원 몇 개를 더 인수받는다고 하니까.
나 : 일은 막 그렇게 빡세게는 안 시키지?
아빠의 고생담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애쓰는 아들과,
아빠 : 빡세게 했지 우린, 아주 엄청 힘들게 했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아들 앞에서 강한 사람이고 싶은 아빠.
나 : 그건 아빠가 빡세게 한 거고(웃음).
나는 농담과 웃음으로 미안한 마음을 감출 뿐이다.
이후로도 한참은 더 공공 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 아빠가 끝에 내린 결론.
아빠 : 그래서 어쨌든 구가 아니라 시에 하는 쪽에 됐으면 하지.
시에서 뽑는 일이 한결 덜 힘들다는 얘기를 양쪽 모두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들은 아빠의 바람이다.
아빠가 공공 근로를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아니, 아는 데 몰랐다. 도시에 크고 작은 공원이 그렇게 많은 줄. 관리에 드는 품이 그렇게나 많은 줄. 내가 회사에서 일했던 시간에, 내가 직접 볼 수 없었던 평일 낮 시간에 아빠를 비롯한 어르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가꾸고 계셨는 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아빠는 다행히 올해도 공공 근로를 할 수 있게 됐다. 비록 바랐던 시에서 뽑는 일자리가 아니라 작년에 했던 '힘든' 자리 그대로지만.
아빠 : 이게, 한국에 있을 때 강원도나 다른 좋은 데 다니면서 여행을 이렇게 해봤으면 익숙해지는데, 그렇지 않아가지고 그냥 뭔가를 진짜 뭐, 보러만 다녔으니까. 그래서 인제 있을 때 옛날에 오일장이 있었잖아. 그러면 다른 거 볼 거 없으니까 오일장 가서, 요새 정선도 오일장 유명해서 사람들 많이 가는데, 지금 인제 내려가서 양구나 인제나 원통이나 장날 보면, 옛날 같지 않아. 요새 시대 와서 많이들 바뀌어가지고.. 그게 어떨 때는 인제 가서 장날 마주쳐서 가 보면... (예전 하고 달라서)그리워진다고. 그런 건 있어.
새로운 여행 스타일에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는지 묻는 내 말에 아빠는 문득 강원도 오일장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는 어딜 나가도 볼 거라고는 오일장 밖에 없어서 그 기억이 오래 남는데, 이제는 그 오일장이 예전 같지 않더라는 말이다. 아빠는 오늘 몬쨈에서 본 천막 상점 때문에 갑자기 오일장 생각이 난 걸까.
나 : 뭐 어쩌겠어, 사람이... 세상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아빠 : 옛날에 (오일장) 가면, 천막이라기보단... 옛날 천막, 초록색으로... 그리고, 가마솥 가져다 놓고 소머리 국밥 팔고... 이젠 그런 거 다 없어졌잖아.
나 : 그래도 인제 오일장 보단 아빠가 더 많이 변했을 걸. 사람이 더 많이 변해.
아빠 : 내가 변했기 때문에, 옛날 그게 보고 싶어서 가면 이제 없단 얘기지.
나 : 나도 변하고, 그것도 변하고.
아빠 : 그럼.
아빠는 격하게 동의했다.
세월이 지나 오일장이 변했듯, 아빠가 변했듯, 나도 변했다. 30년 전 30대 후반의 아빠는 지금의 아빠와 같지 않고 나도 여덟 살 꼬마일 때의 내가 아니다. 어제의 아빠가 오늘의 아빠와 다르고 지금의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변하지 않은 건 '아빠'와 '아들'이라는 관계의 이름표뿐이다. 그 이름표 달고 있는 아빠와 나 자신이 시간에 따라 늘 변해왔으니 관계의 내용 또한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변해왔을 것이다.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의 관계가 노년의 아빠와 장년의 아들의 관계로 변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왔을까. 하루하루, 끊임없이.
세상 모든 어린 아들이 그렇듯 한 때 아빠는 내가 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아빠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미니카를 조립해주겠다는 아빠에게 '동네에 아빠보다 더 조립을 잘하는 형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쯤부터 아빠가 잘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괘씸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빠의 우는 모습을 보고 아빠에게도 약한 모습이 있다는 걸 알았다. 돈 문제를 일으키는 아빠를 본 중학교 때는 어쩌면 아빠가 생각 보다 흠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지금은, 둘이 함께 사진 찍을 때 아빠가 먼저 내게 기댄다.
나 : 그래도 이 정도면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잘 다니는 거야.
아빠 : 근데 난 만날 끌려다녀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 : 그런 건 어쩔 수 없긴 해.
아빠 : 그러니까, 내가 시작하지 않은 거니까.
나 : 그래도 내가 설명을 해주잖아. 그리고 아빠가 질문을 더 많이 해야지. 좋은 학생은 질문을 잘하는 학생이거든.
아빠 : 이야~ 허이구.
아빠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추임새를 넣고는 말을 이었다.
아빠 : 지도를 펴놓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다녀야 하는데. 그 여행책 비싸 게 주고 산 건데.
치앙마이에 오기 전 아빠는 나에게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듣고는 치앙마이 여행책을 사 와서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여행 출발하던 날, 아빠 책상에서 처음 봤다. 치앙마이에 간다는 말만 했지 뭐 하나 설명해준 것이 없었다는 걸, 그 책을 보고 깨달았다.
아빠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관계도 변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건, 예나 지금이나 내가 아빠를 생각하는 것보단 아빠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크고 무겁다는 사실. 그건 왠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