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짝 Oct 22. 2020

Day 8-1.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마지막 아침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빠와 나 6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단점의 거울을 보는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살 따가운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내 노년의 가장 그럴듯한 스포일러는 지금 내가 보는 아빠다.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마지막 아침


치앙마이에서 맞이하는 '사실상' 마지막 아침 해가 밝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일은 이른 아침에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새벽 다섯 시 반 전에는 체크 아웃을 하고 공항에 가야 한다. 경유지인 방콕에서 몇 시간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치앙마이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여덟 시가 채 되지 않은 아침에 호텔에서 나온 아빠와 나는 올드시티 남쪽을 향해 걸었다. 지금까지 주로 북문(창푸악 게이트)이나 동문(타페 게이트) 주변을 돌아다녔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다.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햇살이 쨍해서 올드시티 남쪽 문인 '치앙마이 게이트'를 통과했을 때 만난 커다란 나무와 해자, 해자에 설치된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이 다 같이 창창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제 몬쨈에서 본 일몰이 생각났다. 어찌하여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이토록 다를 수 있는 걸까. 애틋하게 저물며 헤어졌다 하룻밤 만에 다시 만난 해는 기운이 넘쳐 보였다.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온 땅에 기운을 나눠주고 있는 듯했다.



햇살은 강하지만 산뜻하고 선선한 공기가 감도는 아침 산책에 아빠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자고 일어나 기운이 가득 찬 시간이라 그런지 길 가다 보이는 나무와 풀 때문인지 아니면 덥지 않아서인지,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이맘때 하는 산책길에서 아빠는 늘 좋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더없이 좋은 마지막 아침. 마지막이라는 아쉬움마저 잊게 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반 베이커리(Baan Bakery)


아침 산책의 발길이 닿은 곳은 주택가 골목길 마당이 딸린 2층 집을 개조한 모습의 베이커리 카페였다. '반 베이커리'라는 이름의 이 빵집은 브런치 카페로 특히나 유명한데, 오전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재료가 동이 나기 때문에 말이 브런치지 가급적이면 오픈 시간 즈음에 맞추어 도착해야 기다림과 재료 소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번 여행 처음으로 호텔 조식을 포기하고 밖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아빠와 나 각자 하나 씩, 비치된 작은 주문 용지를 뽑아 들고 거기에 적혀 있는 빵 종류와 샌드위치 속재료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볼펜으로 체크한 뒤 카운터에 건네주면서 커피를 함께 주문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문 용지에 체크한 그대로 만든 샌드위치가 나올 것이다. 빵이 맛있고 안에 들어가는 속재료도 신선해서 이곳의 '주문형 샌드위치'는 손님들에게 특히 반응이 좋다.


카페 건물 측면 좁은 마당에 놓인 작은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흔하디 흔한 게 나무와 새 지저귀는 소리인 치앙마이라서 어느 카페나 식당 어느 자리에 가서 앉든지 너그럽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반 베이커리



아빠가 꼽은 치앙마이 여행 최고의 맛


나 : 아빤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뭐가 제일 맘에 들었어?
 

아빠 : 특별하게 저거한 건 없고, 피자야 한국에서도 좋아했으니까... 피자는 태국 음식이 아니니까 제외해야 한다고 치면 어제 아침에 맛있게 먹었지.


나 : 어제 아침에? 조식을?
 

아빠 : 어제 아침인가 그제 아침인가, 입에 맞다고 한 데가 있었는데, 아침인가 점심인가 모르겠네.


나 : 응? 뭐였지?


아빠 : 뭐였는지 내가 아무 소리 안 하고 잘 먹었잖아(그동안 참 여러 소리 많이 한 건 아시는 듯).


나 : 뭐지. 뭐였지... 아, 캐슈넛 치킨 그거? 코코넛쉘에서 먹은 거?


아빠 : 그건가?


나 : 닭이랑 불그스름하게 피망이랑 해 가지고.


아빠 : 그래 그거. 피망 있고.


이틀 전 점심에 코코넛쉘에서 음식 이름도 모른 채 영문 설명만 보고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 주문한 그 메뉴(중화풍 매콤 달달한 양념에 닭과 채소를 볶은 음식)가 아빠의 치앙마이 여행 베스트 음식으로 뽑혔다. 메뉴에 적힌 소개글만 보고 아빠의 취향을 저격한 나를 칭찬해야 하나 계획이 무계획을 당해내지 못한 걸 씁쓸해해야 하나.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빠 : 그 담에 찰밥 하고 먹었던 게 뭐지?


나 : 망고? 망고 스티키 라이스. (아빠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 그거 말고 맨 처음에? 요만한 거에 나온 거. 그 집은 어디냐면... 여태까지 갔던 밥집 다 기억하는데. (잠시 생각하다) 아아아, 닭집. 숯불구이 닭 먹으면서 밥 요만큼 나온 거 그거 말하는 거구나"


아빠의 두 번째 선택은 님만해민 청도이에서 먹었던 조막만 한 찰밥. 갈수록 예상 밖이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왔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고, 아빠는 손을 모은다.


아빠 : 이건 멋있다. 먹음직스럽다.


나 : 뭐?


아빠 : 사진 찍은 거.


나 :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이거?


아빠 : 응.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기도를 마친 아빠는 샌드위치 생김새만 보고 벌써 감탄이다.



우리는 둘 다 바게트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서로 한 입 먹을 때마다 잘 구워진 바게트가 내는 바삭 소리를 주고받았다. 아빠는 바게트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걸 처음 봤는지 무척 새로워했다.


아빠 : 아, 이 빵을 이렇게 해서 하는구나. 이 빵을 길게 저거 하면 사람들이 방망이처럼 사 가지고 가서 그냥 뜯어먹는 줄 알았지. 그걸 이렇게 잘라서... 집에 가서 이렇게 해 먹어봐야지 햄 하고 해서.


나 : 빵이 맛있어야지. 이렇게 먹으려면.


아빠 : 사람들이 방망이 같은 빵을 사 가지고 가는데 그냥 이렇게 먹으면…


아빠는 바게트라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지 자꾸 방망이라 부른다.


아빠 : 이게 얼마야?
 

아빠가 먼저 음식값을 물어본다는 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피자나 버거, 샌드위치처럼 한국에서도 즐겨 먹었던 빵 종류 음식에 대해서만 그렇다.


나 : 이거 다 합쳐서(샌드위치 두 개, 커피 두 잔)... 한 9천5백 원?
 

한국에서 이런 느낌의 브런치 카페를 갔다면 얼마쯤 나왔을까 아빠와 궁리를 하다가 대략 15,000원에서 20,000원 사이 어디쯤으로 결론을 내렸다.


서로 말없이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도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풍성했다. 바게트 씹는 바삭 소리. 새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아빠가 커피를 마시며 내는 소리까지.



닮은 듯 다른 하루


오늘은 묘하게 여행 둘째 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날이다.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마지막 날이나 마찬가지인 오늘처럼 여행 둘째 날 또한 여행 첫날 자정이 되어서야 호텔에 체크인했던 탓에 첫날 아닌 첫날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온전한' 여행 첫날과 마지막 날이랄까. 아빠와 함께 치앙마이의 아침을 처음으로 맞이 했던 둘째 날과 내용면에서도 오늘은 많이 닮아 있을 예정이다. 아침을 먹고, 마사지를 받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고, 걷고, 또 이야기하다 저녁을 먹고 쉬는 하루. 모습은 비슷하겠지만 의미는 다르다. 둘째 날이 이번 여행을 제대로 펼치는 하루였다면 오늘은 활짝 펼쳐놓았던 여행을 닫으며 정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벌써 여행의 끝자락이라니. 가버린 시간은 참 어김없이, 어이없이 빠르다.


호텔로 돌아가 잠깐 퍼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돌아다닐 준비를 하고 다시 나왔다. 올드시티 중심 부근에 있는 마사지샵에서 어제 하루 건너뛴 태국 마시지를 받았다. 꼬박 1년 전 아내와 치앙마이에 왔을 때 서로 만족했던 곳이라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곳이다. 사실대로 따지고 본다면 아껴두었다기보다는 타이밍과 동선이 맞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블루 누들(Blue noodle)


누군가 내게 ‘치앙마이 올드시티 안에 있는 식당 가운데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블루 누들'이라 대답하겠다. 태국식 쌀국수 전문점인 블루 누들은 비단 우리나라 여행객뿐 아니라 내,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찾는 ‘핫한’ 식당이다.



그동안 아빠와 들렀던 여러 식당들이 대부분 나름의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지만 쌀국수라는 음식이 워낙 남녀노소와 국적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인 데다 가격 면에서나 양으로나 부담이 적고 회전이 빨라 금방 먹고 일어설 수 있다 보니 접근성이 좋아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아빠와 치앙마이에 머무는 동안 올드 시티를 걸어 다니면서 블루 누들 앞을 지나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마지막이 되어서야 이곳에서 점심을 먹은 이유는 매번 길게 서 있는 대기줄을 보고 '다음에 오면 되지' 하면서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손님이 많은 곳인데 지금 시즌이 특히나 성수기여서 그런 것 같았다. 오늘따라 아껴두었던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던 '동선'과 '타이밍'도 실은 블루 누들과 거리가 가까운 이유가 컸다. 시간과 거리상 마사지를 받고 나와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밀려오는 점심 손님들 무리를 피하면 기다림 없이 한 끼 뚝딱하고 나올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다행히 빈 테이블이 딱 두 개 남아 있을 때 도착할 수 있었다.



쌀국수 전문점이라 쌀국수가 메뉴의 거의 전부이지만 종류는 꽤 다양하다. 면발이 굵기에 따라 셋으로 나뉘고, 국수에 들어가는 건더기 종류가 돼지고기, 쇠고기에 고기 형태도 삶은 고기, 조림, 완자로 세분화되어 있어 십수 종을 훌쩍 넘어간다. 아빠는 무난하게 고수를 넣지 않은 쇠고기 쌀국수, 나는 고수를 듬뿍 넣은 쇠고기 쌀국수를 골랐다. 살짝 달큰 짭조름한 국물과 쌀국수 면이 잘 어울리는 맛이다.


누군가는 이곳 쌀국수의 맛을 보고 그렇게까지 기다려 가면서, 찾아가서 먹을 정도로 맛있는지 모르겠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유명세가 일정 이상을 넘어서면 손님이 손님을 부르기도 하는지라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나에게 블루 누들은 근처에 있을 때 가볍게 들러서 한 그릇 하고 가기 좋은 곳, 가급적 사람이 너무 붐비는 식사 시간을 피해서 간단한 요기로 먹으면 더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아빠 :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좀 세다.


아빠의 한 줄 평은 이랬다.



반 비엠숙(Baan Piemsuk)


서울에 한강, 방콕에 짜오프라야강이 있다면 치앙마이에는 '핑강'이 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핑강은 치앙마이 올드시티에서 동쪽으로 1km 남짓 가면 볼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본 핑강은 방콕에서 봤던 짜오프라야강처럼 강폭이 넓지 않았고 흙빛 강물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검색을 하면서 찾아보니 핑강의 발원지가 아빠와 다녀왔던 치앙다오의 산이라고 하는데, 핑강은 600km를 넘게 남쪽으로 내려가 짜오프라야강이 되어 태국의 남쪽 끝까지 흘러 바다와 합류한다고. 짜오프라야강의 길이가 1200km를 넘는다고 하니, 치앙다오의 산 위에서 출발한 강물이 1800km 넘는 여정을 지나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고 생각하면 뭔가 아득해진다.


나보다 먼저 장모님과 치앙마이를 다녀간 아내는 여행 일정 중 2박 3일을 핑강 주변의 호텔에서 지냈다. 아내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내게 핑강 주변의 카페 몇 곳을 추천하면서 강가를 따라 걷는 것도 좋겠다고 권해주었다. 아빠와 점심을 먹고 핑강으로 넘어와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아내가 추천해준 '반 비엠숙'이라는 카페였다.


밖에서 봤을 때 시원하게 드러낸 시멘트 벽면과 나무로 만든 문의 조화가 인상적인 반 비엠숙은 카페 내부도 시멘트 바닥과 벽이 만들어낸 공간을 목조 테이블과 의자가 채우고 있었다. 그 묘한 어울림이 주는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아직 손님이 많이 들지 않아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카페의 시그니쳐 메뉴로 보이는 코코넛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를 앞에 두고 아빠와 마주 앉았다. 아빠는 여전히 가는 카페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나 의자가 있으면 거기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이고 반응한다. '이건 무슨 나무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나도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 가늠해보는 것이다.
 

나 : 뭘 그렇게 봐?


아빠 : 나무 가지고 이렇게 맨든 거 유심히 보는 거야.


나 : 이건 너무 수제 느낌이 아니라 공산품 느낌이잖아.


아빠 : 이런 건 공산품이지. 그런데 이 구조, 이런 거는 얼마든지...(만들려고 하면) 옛날에 아빠 OO화학 처음 다닐 때, 그거 탁자 만들었던 거 모르지?


나 : 아빠가 바둑판 만든 건 알아.


아빠 : 바둑판이랑, (나무로)포도 열매 모양 만든 거. 교회 십자가, 하트 모양 그거 초등학교 애들이 쓰는 조각칼로 아빠가 다 만들었어.


나 : 들으니까 기억나네.
 

아빠는 또 시골에 땅 사서 컨테이너 집이라도 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연습이 필요한 일


나 : 마지막 날인데 내가 오늘 오후에는 아빠한테 자유를 줄까?


아빠 : (시큰둥하게) 뭐할 게 있어.


나 : 아빠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아빠 : 가서 자는 거지 그냥.


나 : 자고 싶으면 자. (아빠가 반응이 없자) 그건 또 싫어?


아빠 : 뭘 알아야 어딜 가든가 하지.


나 : 이런 거지. 야, 나 그냥 어디 이런이런 카페에 뭐 시켜놔 주고 두 시간만 혼자 냅둬라. 이렇게. 아니 뭐 어른들은 몰라요도 아니고 다 싫어?(웃음) 그럼 호텔 수영장에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어?


아빠 : 수영하는 사람 한 번도 못 봤다.


나 : 몸 좀 담그다 선베드에 이렇~게 누워 가지고 휴대폰으로 장기를 두던, 책을 보던.


아빠 : (웃으며)아빠는 그런 데 소질은 없어.


나 : 그게 무슨 소질이 필요해? 그냥 누워서 책 보는 게.


아빠 : ... 한 번도 그래 보지 않아서 그래.
 

나 : (웃으며)한 번 그래 봐.


아빠 : 아잇, 안 되는 걸 하라 그러니.


호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한가하게 노니는 게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나. 아빠의 대답에 짠해지려다가 그 와중에도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휴대폰 화면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아빠가 다시 불편해졌다.


짜증을 꾹 참고 아빠가 휴대폰으로 무얼 보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로 했다.



이전 17화 Day 7-2. 아빠 인생에 없던 꽃길을 여기서 걷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