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는 어디서 먹었나?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묘하게 붙어 다녔다. 잘 자야 먹을 수도 있었고, 잘 먹어야 잘 수도 있었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 할 잘 먹고 잘 자는 것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8년 전 제주도 작은 마을로 이주했을 때만 해도 마을에는 흔한 편의점 하나가 없었다. 문만 열면 온갖 프랜차이즈 가게로 북적대던 신도시에서 살다 제주로 날아온 지 하루 만에 머나먼 과거로 되돌아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 안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오로지 밭 뷰와 바다 뷰였다. 종일 자동차 경적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윙~하는 이명이 들릴 정도로 고요한 탓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요란한 소음에 노출됐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녁 7시만 넘으면 새까만 하늘엔 뿌려 놓은 것처럼 별이 반짝였다. 소음은 물론 빛 공해 없는 무해한 마을에 짐을 푼 첫날 나는 단잠을 잤다.
반짝이는 별도 좋지만, 아이들을 먹여야 하지 않나! 장을 보려면 먼 길을 걸어가야 했고 배달 시스템이 있을 리 없었다. 시장을 오가는 길에 바다가 없었더라면 제주말로 '육지 것'의 시골 살이는 금방 무료 해졌겠지만, 바다 덕분에 스스로 자처한 불편함이 문제 될 게 없었다.
바닷길을 따라 도착한 시장에선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야 했는데, 난 들고 올 수 있는 만큼만 사는 생활에 만족했다. 그 외엔 이웃이 나눠 준 갖가지 농수산물이 시골 생활의 귀한 양식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매 끼니 집밥을 해 먹는 건 필수였다. 물론 관광지니 주변에 맛집도 많았지만, 기회가 많지 않은 시골살이에서 아끼며 사는 건 기본이었다. 모든 끼니 대부분을 우리 집만의 가정식으로 만들어 먹었고 빵이며 생일 케이크도 직접 만들었다. 모양이 훌륭할 필요도 없었다. 집안 가득 따뜻하고 좋아하는 냄새로 가득할 때 마음이 푹, 놓이는 그 감정을 자주 전해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아침밥 먹는 것만큼은 원칙으로 정했다. 입맛 없고 바쁜 아침이니 가능하면 간편히 먹을 꼬마 김밥이나 주먹밥, 덮밥식 아침을 준비했다. 속이 든든해지는 아침은 없던 자신감도 생기게 한다고 믿었다. 지각을 할지언정 아침밥은 다 먹어야 학교에 갈 수 있단 것을 안 뒤론 아이들도 두 가지를 모두 지키기 위해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힘들 일이었다.
문제는 5년 반 만에 작은 마을에서 제주 시내로 나온 뒤부터였다. 상급학교를 시내로 가게 된 것인데 학교는 버스를 타기도 애매하고 걷기엔 조금 먼 거리에 있었다. 아침에 겨우 요기할 정도의 밥을 삼키고 문을 열고 나가는 아이 얼굴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우선 기본 체력이 약한 것부터 문제긴 했지만 수시로 이뤄지는 수행평가에 밤늦게까지 과제며 평가준비를 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수면이 부족한 상태였다.
방과 후, 아이는 친구와 간식을 먹고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먹는 것은 주로 매운 떡볶이, 마라탕, 탕후루, 공차 정도를 돌아가며 먹는 것 같았다. 간식을 먹고 온 날은 저녁을 거르고 초저녁에 잠들기 일쑤였다. 밤 8시쯤 다시 일어나서 과제며 평가준비를 마저 하고 늦게 잠드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아이는 자극적인 음식 먹는 걸로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괜찮은 걸까 염려하면서도 학교를 다니는 이상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 당시 아이는 자주 배가 아프다고 했고, 몇 번에 한 번은 꽤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뻔한 상황을 두고도 계속 '중2'라 그렇다는 말로 눙칠 뿐 아무런 상황도 바꿀 수 없었다.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가도 되는 걸까? 먹고 자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오해가 생기는 일은 많다. 의도치 않은 말로 상처를 주기도 쉽다. 사춘기 아이와 자주 부딪히며 방법을 찾지 못해 막막할 때도 말은 줄이고, 오히려 정성 담긴 끼니를 묵묵히 챙겨 먹이는 게 더 나은 해결의 실마리가 됐었다. 먹인다는 것은 결코 배만 불리지 않았고 말보다 묵직한 진심을 함께 전해주기 때문이었다.
우린 우선 멈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