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와 여름 방학!
곧 여름 방학이었다.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겐 휴가의 시작이지만, 보호자에겐 더운 여름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야 하는 한 달 살이의 선언이었다. 게다가 이번 방학 우리 집엔 '진행형 사춘기' 청소년이 두 명이나 있다. 마음의 준비 없이 덜컥 방학을 맞을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작은 학교'에서 보낸 막내를 제주 시내 중학교에 보내게 됐을 때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아이는 초등학교 때 열심히 뛰놀던 경험을 백분 살려 친구사이에 제법 인기 있는 중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도 조금씩 없던 행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것은, 방어적인 말투와 혼잣말 처럼잦은 다짐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공부를 더 열심히 해볼 거라든가,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을 고쳐보겠다는 식의 긍정적 내용이긴 했지만, 문제라면 밑도 끝도 없이 방어를 하고, 다짐한다는 점이었다. 아이가 어떤 이유로 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 건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우린 학교에 현장체험 활동 신청서를 제출했다.
곧 방학이 다가오기 전에 평화로운 방학 생활을 위해 태풍의 눈이라 할 사춘기 중2의 속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과연 아이의 고민은 무엇인지, 어떤 일에 주로 자극을 받게 되는지 직접 들어 보고 싶었다.
"엄마, 학교는 시험을 위해서 다니는 거야?"
아이의 고민은 비교적 간단했지만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게의 청소년이 그렇듯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기말고사를 준비했고, 그 사이에도 과목별 수행평가를 치르느라 정신없는 학기를 보냈으니까. 하지만 아이의 고민이 발생한 지점은 그다음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까지 열흘 남짓 등교했지만, 학교엔 시험종료와 함께 더 이상 준비된 프로그램이 없었다. 시간 때우는 방식의 일과를 경험한 아이가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결과 만을 위해 학교가 존재하는 것인지 물어온 것이었다. 오래된 관행인 것을 알고 있다.
과거에는 봄방학 하는 2월 전까지 추운 날에도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틀어준 영화를 하릴없이 보다 하교하곤 했었다. 아이가 제시한 의문대로 해외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토론수업이 당연하게 이뤄지는 시대에 우리 교육은 현실을 외면하고 시대를 역행하는 게 분명했다.
아이가 경험하는 환경이며 이미 사회 구조 전반이 바뀐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부모세대와 다를 바 없는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세대가 바뀐 문제가 아닌 시대가 바뀌었으면 그에 걸맞은 경쟁력을 키워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에게 여전히 공부를 통해서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70-75%가 되지만 전공대로 취업하는 비율은 40% 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본 적 있다. 경쟁에 줄 세우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삶이 보장될 것처럼 속삭이던 말도 이제는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열다섯 살에게도 '삶을 가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기 싫은 건 왜 싫은 건지?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스스로 고민할 시간 없이, '경쟁'과 '비교'에 줄 세워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사회적 성인이 됐을 때, 우린 그 상태를 정말 성인이 됐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열심히 해야죠!"
아이는 고민을 털어놓다가도 몇 번이나 다짐하듯 말했다. 그때만큼은 '엄마'가 아닌 그 시기를 지나온 선배로써 '멘토'가 되고 싶었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너는 너로서 이미 괜찮고, 애초에 뭐가 된다는 기준도 없으니 타인 시선에 맞추느라 애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부터 고민하자 말했다. 스스로 보람 있고 행복하면 된 거니까, 미리 아무 염려도 하지 말자는 말로 위로를 전했다.
둘이 수영을 하며 어릴 때처럼 함께 장난을 치는 동안 아이는 금세 장난칠 거리를 찾아내며 밝아졌다. 아이가 웃으니 된 거였다. 여름방학에 모자란 공부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나부터 이번 방학은 오롯이 열다섯 살 아이가 살 수 있는 삶을 스스로 꾸려 보도록 도와줄 결심을 하며 아이 곁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