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큰 산 하나를 힘겹게 넘었다고 해서 다시 산을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달리는 차창 밖 풍경은 순식간에 몇 개의 능선을 지나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좀처럼 그런 속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부단히 글을 써왔지만, 지금 나는 마치 한 번도 글이라곤 써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막막하다. 아마도 나는 산 중턱에서 길을 잃었거나, 고약한 웅덩이에 발이 깊게 빠져버린 모양이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상담 치료 날이었다.
20대에 시작한 PTSD 치료가 50대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 셋을 키우는 시간 동안, 이 과정은 내게 절대적인 생존 조건이었다.
다만, 어제 상담은 평소보다 길었고 나는 조금 울먹였다. 결국, 줄였던 약 한 가지가 다시 추가됐다. 병원을 나오며 나는 내가 울음 끝이 긴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썼다고 믿었지만, 정작 나 스스로에게도 꺼내지 못한 말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내 뒤를 따르는 그림자를 외면한 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으로부터 눈을 피하지 않아야만 그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로 한다.
당분간은 '살기 위한 글'을 쓰려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긴다.
무너진 하루를 기워낼 한 줄의 문장,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붙잡고 나를 달래 볼 생각이다. 그 기록들이 지팡이가 되어, 마침내 웅덩이에서 스스로 발을 꺼내어 다시 걷게 되는 꿈을 꾼다.
산을 넘고 또 다른 산 앞에 서있는 분들과 이미 그 산조차 가뿐히 넘어선 분들, 웅덩이에 발이 빠진 채 애쓰는 분이 있다면 함께 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