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매일 인형놀이를 하듯 아침마다 내 머리를 이리 묶고 저리 땋고 하였다. 꼼짝없이 엄마 앞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끔 소리를 지를 만큼 세게 머리를 잡아당겨야 하는 일이 나는 정말 싫었다. 엄마는 특히 '디스코 머리'라고 불리는 머리 안쪽에서부터 촘촘하게 세 갈래로 땋는 스타일을 즐겨했는데, 내가 아침부터 비명을 지른 횟수만큼이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에게 (아니 엄마에게) 머리가 참 예쁘다는 칭찬을 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난생처음으로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잘리고 말았다. 엄마가 암으로 수술을 한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고 더 이상 아침마다 내 머리를 묶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제는 엄마 앞에 앉아서 꼬리빗에 머리를 찔려가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는데,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아쉬움에 머리를 자르기 싫다고 울고 불며 엄마를 속상하게 했었다. 그리고 그때쯤 2차 성징으로 내 작은 가슴도 조금씩 부풀고 있었다. 여러모로 가슴이 아팠던 시기였다.
내가 임신을 하고 엄마 같은 나의 이모들은 한국에 와서 출산을 하라고 권하였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고 친정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엄마 없이 산 세월이 20년이 넘은 나에게 출산은 그냥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의 아빠인 남편의 일이기도 했기에 나는 여기에서 남편과 함께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였다. 다행히 나는 입덧도 거의 없이 비교적 수월한 임신 기간을 거쳤고, 유도분만으로 3시간 만에 아이를 낳은 '출산이 제일 쉬웠어요' 산모가 되었다. 아마도 하늘에서 엄마가 도와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내 뱃속에서 사람이 하나 나왔다. 당연히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내 속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내 품에 안겼다. 엄마 심장 소리와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안정을 찾는가 싶었더니 바로 엄마 가슴팍에 시원하게 태변을 싸버렸다. 남편이 탯줄을 자르고 아이에게 초유를 먹인 후 아이의 키와 몸무게를 재고 아이의 첫 배냇저고리를 입혔다. 그리고 간호사는 나에게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묻더니 샌드위치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엄청 갈증이 났던 나는 그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아뿔싸'하며 주스를 내려놓고 간호사에게 따뜻한 차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배냇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체온을 보호해줄 신생아 모자를 쓰고 새하얀 속싸개에 돌돌 말린 귀여운 내 아기는 병원용 아기 침대에 눕혀졌다. 그제야 아기가 빠져나온 내 몸에도 모든 후처치가 끝나고 간호사는 나에게 샤워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 이모들이 있었다면 절대 안 된다고 했겠지만 진통을 겪는 내내 나는 구토를 했고 밑도 뭔가 찝찝한 느낌만이 가득했으며 가슴에는 아이가 똥까지 싸놓은 형국이었기에 도무지 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씻다가 힘들면 언제든 호출하라고 했지만 나는 샤워 후 욕실 바닥에 남은 물기까지 타월로 싹 다 닦아놓고 나왔다.
호주 산부인과에는 신생아실이 따로 없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 안겨주고 엄마 젖을 물려주고, 병원용 아기 침대에 눕힌 다음 엄마와 함께 엄마 병실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엄마와 24시간을 쭉 같이 보낸다. 제왕절개를 한 산모도 예외가 아니다. 병원에서 아기가 울어서 하반신 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아기 침대로 걸어가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는 엄마도 있었다. 아무튼 여기 엄마들은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이때부터 진짜 산고를 겪는지도 모른다.
병원에 총 6일이나 있었다. 보통 호주에서는 자연분만인 경우에는 하루 이틀 만에 퇴원을 시켜주는데, 아이가 2.4킬로로 조금 작게 태어나서 매일 몸무게를 재며 성장 발달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행히 병원 밥은 맛있었다. 워낙 다양한 인종과 식문화과 공존하는 멜버른인지라 병원 식사도 선택의 폭이 넓었다. 다만 응급실로 급하게 와서 바로 출산을 하는 바람에 집에 미리 끓여둔 미역국 대신 한국 슈퍼에서 산 인스턴트 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그래도 퇴원 후 한동안은 집에서 밥 한술 뜰 시간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병원에서 6일 동안 끼니마다 배불리 먹으며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젖도 쭉쭉 잘 나왔다.
엄마가 없이 엄마가 되는 일도, 해외에서 혼자 아이를 낳는 일도, 든든한 남편의 지원이 있었다. 기저귀 갈기며 속싸개 싸기, 아기를 안고 어르는 일까지 나보다 남편이 훨씬 잘했다. 운이 좋게도 병원에서 1인실을 쓰게 되어 6일 동안 계속 남편도 같이 있을 수 있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나를 위해 우는 아기를 안고 나가 휴게실에서 기꺼이 불침번을 서주었다. 병원에 있는 내내 낮이나 밤이나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남편은 퇴원할 때쯤 거의 유체이탈 상태였는데 아빠가 되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