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맘 Feb 08. 2020

엄마 말, 아빠 말, 바깥 말, 3개 국어 옹알이

한국어, فارسی, English

우리 아이는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고, 엄마는 한국 사람 아빠는 이란 사람이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 30년을 자기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며, 호주에 온 지 5년이 넘은 지금은 둘 다 크게 어렵지 않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물론 성인이 외국에 무조건 오래 산다고 외국어가 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늘 영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자주 생각하지만, 여기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말하지 않아도 알겠는, 소위 짬밥이라는 것이 생긴다.)


엄마와 아빠는 평소 69% 페르시아어(이란어) + 29% 영어 + 2%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다. 엄마는 10년 전 이란에서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적이 있고, 5년 전 호주에 와서 지금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를 만났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5년간 호주에서 영어보다 페르시아어를 더 많이 쓰면서 살게 되었다. (배우자가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외국어가 느는 것도 결코 아니다. 늘 페르시아어 공부도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같이 살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소위 관심법이라는 것이 생긴다.)






아이는  무렵에 ‘아빠라는 말을 제일 먼저 시작했다. ‘엄마’는 졸리거나 보챌 때만 “어엄마~ 엄마아~” 우는 소리를 내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엄마를 부르는 ‘말’로써 ‘엄마’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는 아빠를 열심히도 불러대는데, 어쩌다 ‘아빠’라고 불리고 있는 이란 아빠 ‘버버’는 (페르시아어로 아빠는 ‘버버’이다) 페르시아어로 “그래, 아들. 어, 내 사랑.” 하며, 아이에게 열심히 대답을 해준다.


돌 무렵 아이가 아빠를 부르던 소리, 발음이 제대로 아빠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하나 트인 아이의 말은 “띠따”,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한국어도 영어도 페르시아어도 아니고, 도무지 어느 나라 말인지 출처를 알 수가 없다. 아이는 요새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하루에 백번도 넘게 “띠따! 띠따!”를 외친다. 덕분에 엄마 아빠의 대화 속에도 ‘띠따’는 하나의 고유어로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그렇게 우리  언어는 3 국어에서 아이의 외계어(?)까지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아주 어릴 때는 집에서 쓰는 엄마와 아빠의 언어에 익숙하지만, 유치원이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아이는 점점 영어에 익숙해진다. 엄마 아빠가 둘 다 한국 사람인 경우도, 반대로 둘 다 이란 사람인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아이가 크고 머리가 굵어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어휘 수가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영어로 생각을 하고 꿈을 꾸고 말을 하는 것이 점점 편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와 아이가 같이 길을 건너는데 달려오던 차가 늦게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깜짝 놀랐을 때, 엄마는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겠지만 아이는 “Jesus!” 하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어쩌면 아이는 평소에 엄마 앞에서는 절대 쓰지 않던(못하던) F*ck 또는 Sh*t 등의 영어 욕이 먼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아이의 모국어(母國語)가 엄마의 언어인 한국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어로 모국어를 mother tougue이라고도 하지만, native lauguage 혹은 first language라고도 부른다. 급박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토박이 언어 혹은 첫 번째 언어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그의 모국어가 아닐까?






호주는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이고, 시드니나 멜버른은 정말 많은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산다. 트램을 타면 영어보다 중국어와 힌디어가 더 많이 들리는 곳이 멜버른이다. 그밖에 세계 곳곳의 온갖 다양한 말들을 들을 수 있고, 그중에서 한국어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심지어 중국인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도) 호주에서 평생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다. 물론 답답함과 불편함은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호주에 살면서도 영어 공부에 게을러지는 변명이자 핑계가 된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도 그랬다. 흔히 호주 태생의 백인을 여기서는 Aussie(오지)라고 부른다. 학교에서 미국식 영어를 공부한 우리는 어느 정도 영어를 알고 있더라도, 처음 호주에 오면 이 오지의 발음과 억양이 상당히 알아듣기 어렵다. 오지들은 호주식 속어나 은어, 줄임말도 많이 쓸뿐더러, 당연히 우리처럼 뇌 속에서 통역기를 돌리며 말을 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속도도 빠르다.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지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내 머릿속은 그들의 얼굴색처럼 새하얘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게도 호주에 살면서 오지들을 피해 다니곤 했다. 차라리 중국식 영어나 인도식 영어가 편했다. 적어도 그들은 나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고, 만약 내가 그들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편했다. 그것은 내 영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모국어식 억양과 발음 때문이라고 나 스스로 위안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는 우리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왼쪽 집은 필리핀 가족이 살고 오른쪽 집은 오지 가족이 살았는데, 나는 뭔가 물어볼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필리핀 가족이 사는 왼쪽 집의 문을 두드리곤 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농담 반 진담 반 ‘’different racist’라고 놀렸다. 백호주의(백인만의 호주를 주장하여 백인 이외의 인종, 특히 아시아인의 이민을 배척하였던 호주의 인종 차별주의)에 반하는 역차별 인종주의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반(反) 백호주의인 내가 아이를 낳고 오지 엄마들이 득실득실한 플레이 그룹(playgroup)에 매주 아이와 함께 나가고 있다. 남편은 살짝 놀란 눈치다. 그런데 사실 나의 목적은 오지(Aussie)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가족이 계속 여기에 산다면, 우리 아이가 계속 여기에서 자란다면, 5년 후, 10년 후 아이의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곳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다 먹었어?”라고 물으면, 아이는 “Yes, mum.”이라고 대답하는 한국 가족들을 볼 수 있다. 남편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아빠가 페르시아어로 “این کار را نکن”이라며 아이를 야단칠 때, 아이는 “Sorry, dad.” 영어로 대답하는 이란 가족들도 많이 본다. 형제자매가 있으면 아이들끼리는 서로 영어로 떠들고 논다. 사실 이민 1,2세대가 공존하는 가정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도 아이도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더 편하고, 외국어는 듣는 것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아이에게 엄마의 언어를 반드시 가르치겠다고, 절대 엄마 앞에서는 영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엄마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엄마가 영어를 잘하지 못할 경우에 더 그렇기도 하다.) 한국에서 아이를 위한 한글 책을 전집으로 사 오고, 아이를 이곳에 있는 한글학교에 매주 보낸다. 하지만 아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엄마가 영어 공부를 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를 쓰면서, 왜 정작 본인은 이곳에 살면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사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호주에 온 지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아이를 보며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다. (아이에게 영어 동화책을 읽어줄 때마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다!) 소통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며 대화는 서로 나누는 것이기에, 아이가 계속 자라서 사춘기가 되고 어른이 되어도, 내가 낳은 아이가 호주인 정체성을 가지고 모국어가 영어가 되더라도, 한국어든 영어든 어떤 언어로든 계속 아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내가 아이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면, 남편이 “مادرت چی میگه؟ (엄마가 뭐라고 하는데?)”라고 아이에게 묻곤 했다. 처음에는 그 장난이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조만간 우리 집에서 나와 아이가 말하는 것을 남편 혼자 알아듣지 못하는 순간이 오겠구나 싶어 조금 슬퍼졌다. 그리고 벌써 나와 5년 같이 산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를 20개월 아이는 알아듣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다.


영국인 남편과 아이 둘과 함께 사는 같은 성당 자매님인 한국분이 있는데, 그분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고 집에서 영어만 쓴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아빠가 엄마와 아이들 말을 혼자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끼리 대화가 단절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라고 했다.


어쩌면 한국식 사고는 그래도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기러기 아빠도 있는데...)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가정교육에서 많이 간과하는 지속적인 가족과의 대화 또한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교육이 아닐까? 식구가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아빠 혼자만 알아듣지 못해 같이 웃을 수 없는 상황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국에서는 아빠가 야근하느라 식구들과 같이 저녁 먹을 시간도 없는 것은 더 슬픈 일이지만...)


아이의 한 달 무렵에 찍은 동영상, 남편이 아이에게 “누가 그랬어? 어머니? 외삼촌 그랬어.”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 덕에 남편의 한국어도 많이 늘었다.
페르시아어로 말은 곧잘 하지만 읽고 쓰기는 많이 부족한 엄마, 그래도 가끔 아이에게 이란 동화책도 떠듬떠듬 읽어주면서 엄마도 같이 배운다.






그나저나 20개월인 아이는 아직도 “아빠”와 “띠따” 밖에 말을 하지 못한다. 벌써 주변에서 청력 검사를 받아보라고, 스피치 전문가를 만나보라고 엄마를 걱정시킨다. 동시에 다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말이 늦다는 위로의 말도 듣는다. 그래,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나도 힘든데 세 가지 언어를 담는 그릇을 빚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겠지 하고 엄마는 믿고 싶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 타고나는 기질과 능력이 다른데, 어쩌면 우리 아이가 언어에 관심과 재주가 없다는 첫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굳이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줘가면서, 3개 국어를 가르치려고 욕심부리는 엄마가 되지 않겠다. 물론 한 언어를 네이티브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과 글을 아는 것을 떠나, 그 언어로만 할 수 있는 생각과 느낌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고, 그 언어가 속한 세계의 역사와 문화까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언어를 네이티브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인생에서 정말 큰 자산이다.


하지만 인생은 즐길 수 있어야 챔피언 아닌가! 아이가 즐길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능력도 그의 인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어도 모자라 페르시아어까지 배우고, 지금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엄마가 어떻게 내 아이의 언어 교육에 욕심이 없겠는가. 지금 엄마가 쓰고 있는 글을 나중에 내 아이가 한글로 읽을 수 있다면 왜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이 인생은 아이에게 돌려주고, 엄마의 욕심은 엄마의 인생을 위해 쓸 것이다.




어서 아이가 말문이 트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천천히 기다려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나보다 영어를 훨씬 더 잘하게 될 아이를 쫓아가려면, 엄마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영어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이다. 저녁 식탁에서 사랑하는 아빠를 왕따 시키지 않으려면, 3개 국어가 뒤죽박죽 같이 자라는 우리 집 언어도 더 튼튼히 구축해야 할 것이다.

엄마 말이든 아빠 말이든 바깥 말이든 중요한 것은 아이와 계속 말을 하는 것이다. 아이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갈 것이다. 아이에게 웃긴 엄마가 될 수 있도록 아이의 유머 코드를 끊임없이 연구할 것이다. 사실 아빠야말로 말도 무진장 많고, 농담 못해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사람인데, 우리 집 우리 가족의 유머 사전도 아빠와 아이와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전 04화 아기매트 위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는 호주 엄마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